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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지MOTHER

09

역경을 극복하는 힘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11-12-16
조회수
946

역경을 극복하는 힘

당신은 아직도 상처 속에 갇혀 있는가?
불평, 불만, 상처 가득한 이 세상에서 참된 회복과 참된 자유, 참된 평화를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들이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이유, 역경을 극복하는 힘이 이곳에 숨겨져 있다.

글 편집부

첫째 딸과의 회복 | 염인순(안산 20기)

직장생활 때문에 친정어머니가 길러주신 나의 첫째 딸 현주… .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하지 못했던 현주의 상처를 어머니학교를 하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 번도 따뜻하게 안아본 적이 없었고, 늘 책망하고 윽박지르기만 했지 “사랑한다.”, “고맙다.”라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던 현주의 발을 씻기며 현주에게 사랑한다 말하고 너를 믿어주는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을 했다.
현주의 발을 씻겨 주었을 때 현주는 그 느낌을 이렇게 표현해 내려갔다.
“어렸을 때 받은 상처가 세족식으로 한 번에 씻겨 내려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나 또한 자녀를 키우는 엄마가 될 것이다. 그 때가 되어 엄마가 해주었던 세족식이 아마 생각날 것이다. 나이가 들면 점점 더 용서를 구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엄마가 먼저 용서를 구하고 사랑한다고 나를 안았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것은 아마도 엄마의 사랑에 대한 나의 미안함인 것 같다.”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다. 상처들이 이제 막 녹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제 현주와의 새날이 시작될 것이다. 마음껏 현주를 사랑해주고 믿어주고 축복할 것이다.


 

나와 나의 만남은 겉사람과 속사람의 조율 | 양정란(북부 5기)

마지노선이란 1차 대전 후 프랑스가 독일군 공격저지를 위해 당시 육군 장관인 A·마지노가 만든 한계선이다. 나 역시 자녀의 배우자에 대한 마지노선을 긋고 기도의 단을 쌓아 나갔다. 결혼을 전제한 만남은 아니지만 남녀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기에, 교제에도 심층적 마지노선을 그었다. 딸의 늦은 귀가(밤 11시)로 갈등이 일어나니 원망은 고스란히 딸의 남자친구에게로 갔다.
이름 석 자, 그리고 육군중위란 계급. 이 두 가지만 알기에 머릿속은 대령인 남편 동기들에게로 달려가고.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을 토로하기도 수차례.
‘어떻게 하면 헤어지게 할까?’하며 각양각색의 시나리오를 짜던 나는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듯이 그의 영혼만을 보고자 스스로 다짐했다.
불교 가정에서 ‘업보’란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며, 친구들조차 그의 삶에 머피의 법칙을 적용한다는 딸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영혼이 보이게 되었다. 불쌍했다. 축복의 언어를 듣고 성장해도 아까운 삶이 저주의 언어에 묶여 있음을 하나님이 보게 하신 것이다.
드디어 그와 만난 어느 날. 그 날은 중위로 진급한 날의 다음 날 이었다.
중위에게 “이 자리에 여자친구의 엄마가 아닌 인생 선배로 앉아 있으니 편안하게 이야기해요.”하며 축복의 언어를 건네니 의아함이 역력하고, 딸을 자랑스러워하는 나의 표현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 하였다.
그 후 가끔 격려와 축복의 문자를 배달하고 있다. 중위는 처음 받아보는 내용에 당황해 하였으나 이젠 감사와 축복의 문자를 나에게 보내기도 한다. 나의 머리와 나의 가슴이 만나니 생각의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영혼의 안경을 통해 보게 되었다. ‘나의 머리와 나의 가슴’ 즉 ‘나와 나’는 성경에 ‘겉사람과 속사람’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 4:16).”
이처럼 ‘나와 나’의 만남은 ‘겉사람과 속사람’이 조율된 내 영혼의 회복이고, 한 영혼을 회복으로 초대함이다.


 

남편의 생각과 행동은 틀림이 아님 다름 | 고귀현(대구 11기)

나는 하나님이 참 좋다. 참 좋다는 말로는 너무 많이 부족하다. 그 좋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싶은데, 성경에서는 내가 하기 어려운, 아니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신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엡 : 22).”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 19 : 19).”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고후 13 : 3).”
내 삶의 무게가 무거워 고민하고, 기도하고, 울고를 반복하며 살아가다가 어머니학교를 만났다. 지금 돌이켜보면 괴로워하고 울며 기도한 기도의 응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첫 강부터 나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다.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나를 이해하게 해주었고 내가 싫어하는 부분의 나를 긍휼이 여기게 하시고 나의 정체성을 보게 하셨다. 그런데 신기하게 나를 이해하고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생기면서 상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생겨났다. 제일 많이 변화된 것이 제일 힘들었던 남편과의 관계였다. 나와 남편은 모든 것이 대립되었다. 우리 부부는 대구란 지역에서 태어나고 살았지만 자라온 환경도 다르고, 서로의 상식 차이가 엄청 났다. 또한 MBTI 검사를 해도 겹치는 부분 하나 없는 정반대의 성격이니 갈등이 말도 못했다. 난 늘 나의 상식을 기준으로 남편을 이상하게 여기고 비난하고 잔소리하며 갱생(?)시키려고 했다. 그 결과는 물론 실패이고 서로에게 상처만 남겼다. 그런데 어머니학교를 통해 나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게 되었다. 남편을 하나님께서 가정의 머리로 세우셨고, 아내는 그 권위에 복종하라고 하신, 늘 불만이었던 말씀에 나의 마음이 진정으로 동의하게 되었다. 어머니학교를 통해 남편이 어떤 존재인지, 그 남편에게 나는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예전에 밉고 짜증나던 남편의 행동과 말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르다는 것을 마음으로 인정하게 되었고, 또 관계의 문제가 ‘너’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란 것을 마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나는 현재 스태프로 거듭 섬기면서 조금씩 깊이 깨닫고 진보하고 있다. 나의 진보에 남편도 달라졌다. 아직 객관적인 시각이란 명분으로 남의 편(?)을 종종 들곤 하는 남편이지만 ‘에쩨르’의 심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성실한 남편이 그저 고맙고 자랑스럽고 귀여울 때도 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지만 분명한 희망은 앞으로 남편과 주님 안에서 함께 누릴 행복을 꿈꾸며 기쁘게 살아갈 것이다.


 

희망의 끈을 붙잡은 회복 | 조형숙(북부 22기)

세상 사람들은 남의 아픔에 그 자리에서 “안 되었어요. 아마 나을 거예요. 힘내세요.”하고 위로해주나,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그러나 어머니학교는 내가 아파하고 힘들어 할 때 늘 기도로 도와주는 나의 버팀목이다. 그 기수가 끝나도 여전히 기도의 불을 지피고 있기에 때늦은 기도 응답을 경험하기도 한다.
몇 년 전 남편이 간암을 판정받았을 때 앞이 캄캄하였다. 남편의 병은 하늘이 무너지는 큰 불안감으로 나를 감싸기에 견디기 힘들었다. 남편을 바라보니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깝다. ‘나와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산 것 밖에 없는데… 얼마나 힘들까? 난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때문에 눈물로 살았다는데, 난 남편을 바라보니 그저 눈물 뿐. 내게 주어진 무게가 너무 힘들어 어머니학교에 발 내밀었고 그때부터 남편 건강은 내 기도제목이요, 함께 섬기는 스태프들의 기도제목 이었다.
북부 22기를 수료한 후, 본부 59기를 섬길 때 남편의 간암이 재발되지 않기를 기도하였고, 62기를 섬길 때도 그랬다. 그런데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62기를 섬기는 도중 날아온 병원의 통보. 남편이 담낭염증으로 수술해야 한단다. 또한 전신마취를 해야 하며, 다른 사람보다 회복이 늦을 수 있단다. 5주차를 향한 내 마음이 너무 힘들어 ‘하나님! 나에게 이럴 수 있어요? 하나님 앞에 헌신하면 축복 주신다더니….’ 원망도 했었다.
63기를 섬길 때 내 기도제목은 ‘남편의 간암이 재발하지 않고, 담낭염증도 수술하지 않고 잘 치료될 수 있게 해 주세요.’이다. 섬기면서도 마음 한 구석은 불안했다.
나의 불안함과 어머니학교의 중보에 하나님은 섬김의 중간에 선물 보따리를 주셨다. 그 보따리는 수술하지 않아도 되며, 6개월 후 다시 검사해 보자는 담당의사의 진단.
‘아, 하나님이 하셨구나. 감사해요. 하나님도 감사하고, 어머니학교도 감사해요. 만약 어머니학교를 만나지 못 하였다면 이 불안감을 어떻게 할 수 없었을 텐데….’ 내가 어머니학교를 만난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감사이다. 어머니학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아 절망의 끈을 붙잡은 나에게 희망이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회복의 동아줄이었다. 또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는 성경의 말씀을 경험하게 하는 간증이었다.
하나님! 어머니학교가 이 땅에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그 학교를 통해 남편의 건강을 한발 한발 회복의 자리로 향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편에 대한 신뢰 회복 | 임후연(과천 1기)

어릴 때 큰오빠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해 청년부 활동을 하면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27살이 되던 해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나에 비해 집안이나 학벌 등 모든 환경이 좋았다. 남편의 집안 쪽에서 보았을 때 나는 턱없이 부족한 며느리였다.
결혼하고 1년 후 우린 주말부부로 지냈다. 남편은 결혼할 때 박사 과정 중 이었고 논문을 쓰면서 대전에 있는 대덕연구단지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뒤로 4년이라는 세월 동안 주말에만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주말에는 거의 시댁에서 지내야만 했다. 결혼할 당시부터 시어머니는 뇌졸중으로 누워 계셨기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다. 평일엔 형님께서 돌보셨고 주말에는 우리가 돌봐야만 했다. 대전을 오가며 지내다 보니 신혼의 맛은 느껴 보지도 못하고 세월이 흘러갔다.
남편은 온순하면서 우유부단한 성품을 가졌다. 그러한 성품이 평상시에는 참 좋지만 어떠한 큰일을 당했을 때는 정말 답답하다.
시댁에 가서 내가 무슨 소리를 들어도 항상 묵묵부답이었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당해도 한 번도 나의 편이 되어 주지 못했다. 원래 다른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는 성격이라 나는 항상 그 모든 어려움을 혼자 견뎌내며 눈물로 많은 시간들을 보냈다. 이러한 시간들이 길어지면서 마음의 병은 점점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결혼에 대한 회의와 남편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잃어 가고 있었다. 내 편이 되어 주지 못하는 남편이 너무 미웠고 가장으로서 신뢰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혼자 가슴앓이를 하고 있을 즈음에 어머니학교를 만나게 되었고 나는 그곳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 정말 5주 동안 속에 있던 모든 것들이 다 눈물로 쏟아져 나왔고 남편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닫고 있었던 마음의 문을 조금씩 다시 열게 되었다. 남편도 나의 힘든 마음을 알게 되었고 너무나도 미안해 했다. 그때부터 서로에 대해서 다시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남편의 성품이 확 바뀌지는 않았지만 나의 편이 되어 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어김없이 어머니와 함께 해야만 했던 시간도 틈틈이 짬을 내서 나와 아이들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남편과의 거리도 점점 더 가까워졌고, 남편에 대한 저의 신뢰와 믿음도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가끔 아이들 문제로 토닥토닥 할 때도 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며 열심히 주님께 찬양으로 영광 돌리며 하나가 되었다.


 

아들의 반항을 잠재운 회복 | 민경근(동부 4기)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학교를 하게 되었고 그때 나는 “우리 집은 문제없어.” 였다. 왜냐하면 아들, 딸, 남편, 모두가 내가 원하는 대로 통제하고 조종하는 대로 잘 살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심하게 사춘기를 겪게 되었다. 나의 통제를 거부하고 반항하기 시작하면서, 아들과의 관계가 깨어졌다. 나는 아들을 다른 방법으로 조종하고, 통제하려 했지만 아들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 되었고, 우리 집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아들은 나의 자존심 이었기에 아들을 변화시켜 보려고 여기저기 훈련학교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결국 아들을 필리핀으로 강제유학 1년을 보내고 나는 상담공부를 시작했다.
아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예고 재입학을 하면서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들은 심한 무기력, 분노로 인한 우울증으로 일반고로 전학을 하고, 결국 자퇴를 하게 되었다. 나는 지옥의 바닥에서 어머니학교를 섬기게 되었다. 무학 어머니학교를 섬길 때, 어머니학교를 섬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학교에서 교복을 입고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을 보니 어젯 밤도 하얗게 밤을 지새우고 방에 홀로 누워 있는 아들이 생각나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한없이 울었다. 아들의 ‘죽고 싶다’는 말을 들으면서 가슴이 미어져 올 때 마다, ‘주님 제가 어머니입니다.’를 마음으로 외치며 눈물을 머금었다.
어머니학교를 섬기면서 나의 자존심과 나의 주인 삼았던 것들이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강의를 통해 나를 돌아보게 되었고, 역기능의 가정에서 잘못된 가치와 신념으로 살아왔던 나의 열등감, 잘못된 사랑의 방법을 깨닫고 그것을 함께 나누며 고백했다. 열등감과 자존심으로 딱딱하게 굳어있던 나의 모습에서 갑옷이 조금씩 벗겨졌다. 하나님의 창조의 모습을 회복하며, 어머니학교의 나눔을 삶으로 실천하여 변화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내가 변하고 편안해지는 만큼 아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소중한 아들을 주셨는지 그 은혜에 감사하게 되었다. 아들의 무기력이 소망을 찾고, 밤에 잠도 잘 자고, 우울증도 이겨내고, 검정고시도 한 번에 합격하여 대학입시를 준비 중이다. 용서는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용서하는 것이라는 말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그러기에 나의 회복의 여정과 우리 가정의 회복의 삶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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