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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지MOTHER

09

관계의 회복

작성자
김성묵
작성일
11-12-16
조회수
1,077

관계의 회복
 

글 김성묵(두란노 아버지학교 본부장)

우리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관계일 것입니다. 사랑은 관계로부터 싹 트는 것이며, 행복도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소도 관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가깝고 특별한 관계를 애착관계라고 합니다. 애착(愛着, attachment)이란 말은 영국의 아동정신분석학자 존 볼비(John Bolby)가 정의한 용어로 사랑하는 대상과 관계를 유지하려는 행동을 뜻하는 정신분석학적 용어입니다. 정서 중심적 부부치료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수잔 존슨(Susan Johnson)은 <Hold Me Tight>라는 저서에서 ‘나를 꼬옥 안아 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애착 대상을 찾는 것은 인간의 기본 욕구로 우리의 유전자에 이미 자리 잡고 있으며, 애착대상을 향한 욕구는 음식, 주거, 성을 향한 욕구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존, 건강, 행복을 향한 기본 욕구의 하나라고 주장합니다. 사회적 동물이라 불리는 인간은 자기 이외의 중요한 타인(Significant Others)과의 특별하고 친밀한 유대감이 필요하고 안정감이 필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타인은 바로 부모님, 그리고 부부 관계일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기 2장 24절에서 25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그 아내와 결합해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둘 다 벌거벗었지만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는 아주 중요한 두 개의 애착관계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부모와의 관계, 부부 관계입니다. 이 애착관계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부모 관계가 일차적 애착관계라면 부부 관계는 이차적 애착관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일차적 애착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입니다. 주고받는 관계라기보다 주고 또 주는, 받고 또 받는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차적 애착관계는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쌍방관계이며, 보다 성숙한 관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안정적인 유대감은 관계를 긍정적으로 만들고 자신에게도 힘을 줍니다. 그러나 관계 속에는 늘 상처가 있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죄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받으며, 잘못된 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관계가 왜곡이 되고 삶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치유는 바로 죄성으로부터의 자유, 상처의 회복, 문화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너희가 내 말대로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내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 8:31, 32)’ 따라서 근본적인 상처의 치유는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진리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우리는 죄성으로부터, 상처로부터, 잘못된 문화로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상처는 대개 중요한 타인, 즉 부모, 남편, 아내로부터 옵니다. 원 상처는 부모, 주로 아버지로부터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잔 존슨은 ‘원상처란 과거 혹은 현재의 관계에서 애착 욕구가 반복적으로 무시되고 거부당해서 받는 상처를 말하고, 당사자는 극도로 예민해지고 심한 정서적인 박탈감과 버려진 느낌을 받는다.’라고 정의합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재 속에 삽니다. 치유라는 것은 과거로부터 자유해서 새로운 현재를 사는 것이며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현재를 바꿔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미래의 산물입니다. 따라서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과거를 바꿔야만 합니다. 그러나 과거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며 인생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치유가 어려운 이유는 과거로 돌아가서 과거를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치유는 과거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어떤 가정사역자는 ‘개인의 암울한 과거사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과거로 되돌아가 통회하는 수밖에 없다. 통회한다는 것은 그 때의 감정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있는 그대로 쏟아놓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 방법도 좋습니다. 그러나 치유는 고백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지만, 진정한 치유는 용서로 완성됩니다. 프레드 러스킨은 용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과거가 현재를 가두는 감옥이어서는 안 된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과거의 아픈 기억을 해소할 길을 찾아보아야 한다. 용서는, 과거를 받아들이면서도 미래를 향해 움직일 수 있도록, 감옥 문의 열쇠를 우리 손에 쥐어준다. 용서하고 나면, 두려워할 일이 적어진다.’ 용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뿐만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감정으로부터 자유함을 주기 때문에 진정한 치유가 일어나게 됩니다. 용서하는 길은 과거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어가 아닌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 과거를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재해석하면 의미가 부여됩니다. 의미를 부여하면 우리는 용서할 수 있고, 용서를 받아들이면 화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고, 과거로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45장 5, 6, 7, 8절에서 요셉은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형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형님들이 저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거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이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하시려고 저를 형님들보다 먼저 여기로 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2년 동안 이 땅에 흉년이 들었지만 앞으로도 5년 동안 밭을 갈지도 못하고 추수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형님들의 자손들을 보존하시고 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나님께서 미리 저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를 여기에 보내신 분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바로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의 주인과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과거를 재해석해서 의미를 부여할 때, 용서할 수 있으며 치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성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용서를 경험한 후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그 이유는 서로 접근하는 방법과 반응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관계는 접근과 반응으로 이루어집니다. 접근과 반응이 일어나면 감정이 교류하고 그 감정의 교류에 따라 관계가 형성 된다는 것입니다. 감정이 상하면 관계가 깨어지고, 감정이 좋으면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접근과 잘못된 반응은 감정을 상하게 만들고 관계를 어렵게 만듭니다. 접근하는 방법과 반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 상대방의 욕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인에게 있어서는 애착욕구는 관계를 맺는 힘입니다. 특별히 부부관계에 있어서 모든 부부는 강한 애착욕구를 갖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친밀감의 욕구입니다. ‘하나 됨’ 즉 ‘연합’의 욕구입니다. 연합을 통해서 안정감과 유대감을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가정사역자는 ‘사람들은 부부간의 사랑을 통해서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부부간의 역할을 통해서 권력에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자녀 양육을 통해서 의미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결혼한다.’라고도 말하기도 했습니다. 친밀감, 즉 정서적 친밀감의 욕구는 그만큼 중요합니다. 친밀감의 욕구가 크면 클수록 거절과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거절당했을 때, 상실했을 때의 수치감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상처입니다. 부부 간에 관계가 깨어지고 감정이 상하면 대개는 처음에는 서로 비난하고 화를 내다가(비난하기), 한쪽은 계속 접근하고 비난하고 한쪽은 숨어버리기 단계로 들어가고, 나중에는 둘 다 입을 다무는 단계로 들어갑니다. 온전한 치유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관계가 개선이 되어야 합니다. 관계개선을 위해서는 접근과 반응의 방법과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네가 대접받고 싶은 만큼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바로 율법과 예언서에서 말하는 것이다.’ 좋은 반응을 얻고 싶으면 접근을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은 생명나무 공동체입니다. 생명나무 공동체는 생명의 언어를 먹고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수고했어요. 힘들었지요. 난 당신만 있으면 되요. 난 당신을 믿어요. 난 당신을 존경해요.”라는 표현을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33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각자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사랑하듯 하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십시오.” 관계 지향적인 아내는 관계가 깨어지면 상처를 받습니다. 존경과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남편은 무시를 당하면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남편은 자기 사랑하듯 끊임없는 배려와 돌봄과 관심으로 아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치유되고 아름다운 은혜의 여성으로 꽃 피어날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존경과 인정, 칭찬으로 두려움과 수치감으로부터 치유되어 관계 속으로 나오고 남자다운 남성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관계 가운데 상처는 반드시 있습니다. 가까운 관계, 애착관계일수록 그 상처는 더욱 클 수 있습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상처를 주게 되어 있습니다. 상처의 치유,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치유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성숙해갑니다. 예수님은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 위에 있으니 이것은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분이 나를 보내셔서 마음이 상한 사람들을 감싸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은 풀어주고,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며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게 하셨다.(이사야 61장 1,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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