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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여승현
어렸을 적 어버이날 카드를 썼던 기억은 있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처음 쓰는 편지가 아닌가 싶네요. 말로도 편지로도 표현 못할 만큼 저 깊숙이에 뭔가 커다랗고 무거운 돌덩어리가 하나 있는데 처음으로 그 돌덩어리를 꺼내 볼까 해요. 과거 기억나는 엄마는 방귀도 안 뀌고 사시는 줄 알았어요.
언제나 차분하고 조용하게 책을 읽던 엄마의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돈 재촉하는 고모의 전화를 받으면 “엄마 없다고 해” 나에게 시키셨지만 차마 거짓말을 못하고 엄마를 바꾸어 주었는데 그때 알았습니다.
화가 나고 불안하면 엄마는 말이 없어지고 책을 읽는다는 것을.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와 행패를 부리는 아빠에게 한마디도 못하고 깨진 가재도구를 치우던 엄마.
물론 아빠에 이런 행동에 대해 저에게는 한마디 말씀도 안하셨지만 엄마가 안 계셨더라면 난 어떻게 해야 할지...
옆에서 잠자는 동생들을 보며 방문 잠그고 벌벌 떤 채 밤을 지새운 날들도 많았다는 것을 엄마에게 이야기 해본 적 없어요.
아빠의 “너 죽인다”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몰래 나와 연필 깎는 칼부터 시작해 과도며 부엌칼을 숨겼던 것도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엄마가 죽을까봐 얼마나 겁이 났는지... 엄마가 없으면 이 무서운 밤들을 어떻게 지새워야 할지도 엄마에게 단 한 번도 이야기 한 일도 없었지요.
아빠의 폭력에 드디어 가출을 했던 엄마. 노란 잠옷에 맨발로 도망간 엄마를 미워한 적 없었어요.
그때 아마 서서히 여자로서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했나 봅니다.
엄마가 없던 그 기간에도 아빠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요. 여전히 술을 드셨고 우리가 밥을 먹는지 굶는지 관심조차 없어 보였습니다. 누렇게 색 바랜 런닝을 보고도 뭐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으셨습니다. 주인과 같이 살던 집 지하 셋방에 살게 되었을 때도 아빠는 저와 동생들보다는 자기 체면을 더 중요시 하셨죠.
동네 사람들이 엄마 어디 갔냐고 물으면 시골 할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시골 갔다고 하라고. 슈퍼 앞에서 동네 아저씨들과 술을 마시며 아저씨들에게도 엄마는 시골 가서 없다고 이야기 하셨죠.
옆에서 듣고 있던 동생이 “엄마는 도망갔어.” 이야기를 했는데 아빠는 동생을 때리려 했고 겁이 난 동생은 나에게 달려와 숨었습니다.
따라 들어온 아빠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러다가 맞아 죽겠구나 싶었지요.
저도 모르게 발길질을 제 몸으로 막았습니다. 동생을 지키려고….
그때 또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엄마는 당신 몸으로 아빠를 막았다는 걸.
그게 엄마의 삶이었다는 걸. 그 삶이 나의 삶이 된 것이 너무 슬프고 억울했지만 엄마가 돌아오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이런 아빠와 같이 사느니 엄마 혼자 사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다시 돌아온 엄마가 반갑지만은 않았어요.
그냥 혼자 살지 왜 돌아왔는지.
예전처럼 가재도구를 깨는 일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술을 마시고 식구들을 고문하는 아빠랑 사는 엄마가 불쌍하고 한편으로는 답답해 보입니다.
엄마는 “너희 삼남매가 나의 희망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난 절대로 엄마처럼 살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오히려 더욱 굳게 만들어 주셨지요.
아빠 같은 사람과 같이 사느니 차라리 결혼하지 않겠다. 술 담배하지 않고 책임감 강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준혁이를 낳았고 벌써 36개월이 지났습니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네가 나의 희망이다.”라는 그 말 뜻을.
이렇게 조금씩 엄마를 이해하면서 어머니가 되어가는 저를 봅니다.
삼남매 키우고 공부시키느라 관절과 간이 나빠 고생하는 엄마를 보면 가끔은 속상하고 참 미련하게 사신 것 같다는 말을 했지만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신 엄마의 삶에 존경과 감사를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 안산에서 큰딸 승현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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