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고 행복한 가정들이 만드는
더 좋은 사회 더 좋은 세상
아내 수기 릴레이 1
절대 화환 금지 !
글 심정주(본부)
절친 후배 K모군과의 모종의 거래가 있던 그 날은 1995년 5월 25일, 잠실의 X카페에서였다. 그곳에서 모든 손님들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들은 우리 둘이 앉은 테이블로 집중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20대의 젊은 남자와 40대 아줌마가 이런 카페에 온 것도 그럴 것이요, 우리 조그만 테이블 옆에는 180cm에 가까운 화환이 떡 하니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나, 이건 좀 심한 것 같아요. 저한테 왜 이러세요.ㅠㅠ” K군이 난감해 하며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에 시선도 못 마주치며 나에게 입을 땠다. “너와 나와의 관계에서 이 정도는 당연히 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니니?” 나의 단호한 어조에 K군은 화환을 한 번 올려다보며 고개를 젓는다. “지금 네 여자친구 누가 소개해 줬지? 걔랑 트러블 있을 때마다 아낌없는 조언을 해준 건 또 누구더라? 너 휴가 나올 때마다 밥은 얼마나 사 줬으며… . 너 무조건 해야 해. 화환 짊어져!”
그 큰 화환을 등에 짊어지고, 새 점퍼에 꽃물이 질질 흐른다며 투덜대면서, K군은 다방 같은 카페를 빠져나갔다. 나는 50~60대 아저씨들의 쑥덕임을 끝내 참아내고, 30여 분을 창가에 홀로 앉아 K군이 향하는 건물 하나를 예의 주시하며,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24시간 전을 떠올린다.
전날 저녁 남편은 예전엔 볼 수 없었던 어두운 표정으로 혼잣말 하듯이 ‘요즘 힘드네?’ 라는 말을 뱉어버렸다. 남편의 입에서 힘들다는 말이 나온다면 이건 보통 힘들다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엄살과 과장을 악의 축으로 여기는 그였다. 퇴근 후 그의 입에서 회사일의 근황과 어려움 등은 절대 내비치지 않는 것을 남성성의 상징처럼 여기며 살아왔던 그. 그의 긴 한숨은 나의 모든 촉각을 긴장시켰다. 웬만한 애교나 이벤트는 이 시점에 통하지 않는다. 위로는 더더욱 그를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안하던 말을 다하네? 빨리 씻고 저녁 드세요.” 한 귀로 흘리듯 대수롭지 않게 행동하였지만, 내 머릿속은 이미 불쌍한 희생물 K군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아무 일도 없는 듯 웃으며 출근하는 남편의 등 뒤로 야심 찬 결의를 다짐하며, 사진과 동일한 화환을 그의 회사가 정면으로 카페로 배달시키고, K군을 급하게 호출했다. K군. 5년 넘게 교회 선후배로 친남매 이상의 정을 돈독히 쌓아온 그는 훤칠하고, F4다운 외모와 달리, 오직 의리 하나로 인생을 살려는 무모함이 매력인 25세의 청년이다. 그의 인생관을 지극히 존중한 나는, 지금이야말로 너의 의리가 빛을 발할 때라며 그를 불러냈다.
“이 다방 오늘 오픈했나 봐. 웬 화환?” 아 ~! 그는 그 배달되어 내 옆에 서 있는 화환이 자신이 오늘 짊어질 십자가인 줄을 몰랐던 것이다. 미안하다, K군. 너에겐 세 가지 임무가 있다.
1. 이 화환을 지고 그의 사무실로 당당히 들어가 “XX님 앞으로 온 화환입니다.”를 외쳐라.
2. 웅성거리는 회사 분위기에 기 눌리지 말고, 반드시 XX님의 눈을 마주 대하며 이렇게 외친다. “XX님의 아내 분께서 사랑하신다고, 힘내시라며 이 꽃을 보내셨습니다.”
3.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라.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K군은 건물에서 뛰어나와, 씩씩거리며 나에게 영화예매권과 베니XX 식사권을 빼앗듯이 받아갔다.
남편의 퇴근 후, 우린 아무도 화환 사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저녁을 같이 하고 TV도 보며 킬킬거리다 그가 한마디 꺼낸다. “담 번에 화환 보낼 땐, 시루떡도 주문해서 같이 보내. 지나가던 사람들이 회사 오픈한 줄 알더라.” 그리고, 우린 다시 TV를 보았다. 요즘도 우리 부부는 어느 결혼식에 가게 되면, 그곳에 진열된 화환을 보며 서로 조용히 미소 짓는다.
P.S: 아참. 여러분이 궁금해 할 K군. 그는 여행가가 되어 세계 오지를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살고 있다. 언젠가 그가 책을 한 권 냈다며, 출판기념회에 나를 초대했다. 그가 보낸 초대 문자 밑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축하의 뜻은 마음으로만 받습니다. 절대 화환 금지!”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