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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지MOTHER

06

비움과 채움

작성자
노용찬
작성일
11-10-26
조회수
909


비움과 채움



글 노용찬(서회교회 담임목사)

요한복음을 읽어가다 보면 매우 큰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좋은 일만 하시는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유대인들은 점점 예수님에 대해서 반감을 갖게 되는가?’하는 점입니다. 급기야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공모하는 내용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잘못을 행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밤낮 없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동분서주하셨습니다. 병든 자들을 고쳐 주셨고, 외로운 사람들을 찾아주셨고, 영적인 공허와 고민에 빠진 사람들에게 생명과 진리의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 특히 그 당시 지도층들은 점점 예수님을 적대시하면서 호시탐탐 해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적대감은 예수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에 의해서 더욱 고조되고 또 구체화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급기야는 다시 살아난 나사로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고 하면서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2장을 읽어가다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 때에 많은 유대인들이 베다니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예수님을 따라 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에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들은 나중에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을 때에 태도가 돌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게 됩니다. 그 소리는 분노의 소리였습니다. 적개심의 소리였습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따르던 사람들이 왜 그렇게 변한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분노의 감정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분노의 감정이란 ‘자신의 기대나 목표가 어떤 사람이나 상황 때문에 방해가 되거나 좌절될 때, 그 목표나 기대를 좌절시키는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서 느끼는 불편한 감정’이라고 정의합니다.
무리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라던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대는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기적을 보았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능력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은 각각 나름대로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되는 꿈을 꾸었을 것이고, 병든 사람은 치유되는 꿈을 꾸었을 것이고, 공부를 못한 사람은 공부하는 꿈을 꾸었을 것이고, 정치인은 정치적인 것을,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하는 일을 꿈꾸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그 때에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아직까지도 깨닫지 못하던 무리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그를 환영하지만 그 외침은 오직 자신들의 기대에 찬 외침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말을 타지 않으셨습니다. 말은 전쟁과 권위와 힘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반면에 나귀는 결코 화려한 짐승이 아닙니다. 죽도록 일을 해야 하는 짐승입니다. 가난한 농부나 혹은 서민들과 동고동락하는 동물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무리들이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무리들의 기대와 목표가 일시에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들이 바라던 메시야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동이 더욱 자신들의 기대나 목표와는 달랐습니다. 자신들의 욕구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무리들은 점점 수군대기 시작합니다. 실망하고 심지어는 좌절합니다. 그러한 실망과 좌절감이 점점 분노로 바뀌어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구약성경에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의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은 고통 속에 울부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조상들과 맺었던 언약을 기억해 내시어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사실을 번번이 잊고 불평과 불만에 빠집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사와 표적을 직접 경험하면서도 모세를 원망하고, 아론을 원망합니다. 심지어는 분명히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스스로 우상을 만들어놓고 ‘여기에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무슨 문제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봅니다. 신앙은 분명히 믿음을 가지고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요? 우리는 종종 신앙이라는 것을 내가 바라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소원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신앙인들은 자신의 계획과 목표와 꿈과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배라고 생각하고,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할 때에 어떤 결과가 있을까요? 바로 유대인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왜 그들은 메시야를 만났으면서도 좌절하고 실망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분노의 소리를 질렀을까요? 자신들의 욕구, 목표, 계획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우상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어떤 욕구와 욕망에 빠져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인기를 얻으려는 욕망, 성취와 업적을 쌓으려는 욕망, 그리고 돈과 재물을 쌓으려는 욕망입니다. 만일 우리가 내세우는 비전이나 꿈속에 이러한 것들이 숨어 있다면 그것은 언젠가 우리를 유대인들이 나타냈던 실망과 좌절과 분노로 이끌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길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려놓음!’
내려놓음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바라게 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거기에는 실망이나 좌절이나 섭섭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시기나 질투나 미움도 없고, 분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 될 때, 주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오히려 그 충만하심으로 함께 하십니다. 사랑으로, 평안으로, 기쁨으로 충만하여 주십니다.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40:31, 표준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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