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고 행복한 가정들이 만드는
더 좋은 사회 더 좋은 세상
글 김수남(캄보디아 1기 지원자)
1남 7녀의 일곱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내 인생은 시작부터 많은 시련 속에서 또한 많은 행복 속에서 지금 두 아이의 엄마가 되기까지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거의 언니들과 동생과 먹을거리로 싸우고 더 멋진 학용품, 옷 등등으로 사소한 싸움이 잦았던 기억이 많습니다. 비가 오는 날 아침이면 서로 좋은 우산을 차지하려고 아침밥도 거른 채, 먼저 집을 나서던 기억도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시느라 참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전엔 몰랐는데 요즘 큰 딸을 위해 작은 도시락 하나 싸는데도 ‘반찬을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영양소를 채워 줄까? 고민하는데 어릴 적 어머니는 그 많은 자식들 도시락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성껏 준비하시느라 얼마나 고생스러우셨을까?’ 새삼 깨닫습니다.
일곱째 딸로 마흔에 저를 낳으시고 다른 부모님들보다 연세가 많으신 데도 학교 운동회 날이면 꼴찌를 하더라도 저를 업고 달리기를 하시던 부모님 생각이 납니다.
사실 어린 시절 연세 많은 부모님이 가끔은 부끄러울 때도 있었습니다. 못된 마음인줄 알면서도 학교에 찾아오시는 다른 부모님들을 보며 늙어버리신 모습이 부끄러워 학교 부모님 모임에 오신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도 가졌었습니다.
딸이라고 공부 많이 시키지 않으시려는 마음에 고등학교 진학도 상고로 원하시던 부모님 의사를 무릅쓰고 시외로 자취생활을 하던 시절, 도시락을 못 싸고 점심때 자취방으로 뛰어와 라면을 끓여 먹고 다니면서도 참으로 꿈이 많았습니다.
부모님 실망시켜 드리지 않으려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름대로 열심히 생활하고 노력했습니다. 딸 중에 4년제 대학을 홀로 진학하게 되었을 때 언니들과 형부들의 도움으로 별로 어려움 없이 대학시절을 보내고, 사회생활을 2년 하는 동안 부모님께 용돈 한번 크게 드리지 못한 게 지금까지도 후회로 남습니다. 그땐 내 몸 하나 챙기는데도 벅찼습니다.
그리고 결혼 후 캄보디아에 와서 살게 된 지 4년, 막내딸로 부모님께 해드린 것도 없는데 지금껏 부모 형제에게 받은 것, 눈곱만치도 보답을 못했는데 타국에서 생활하다 보니 죄송스런 마음입니다. 한국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눈물로 밤잠 못 주무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다시 저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하는 현실에 저도 마음이 무겁고 참으로 힘듭니다.
올 초에 처음으로 둘째 손자를 보시고 기뻐하는 한국의 가족들을 만나고 온 후 전보다 캄보디아에서의 저의 생활은 한층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31살의 지금의 나… 철없다고 하면서도 항상 투덜대는 저를 항상 곁에서 사랑하고 아껴주는 남편과 보물 1호, 2호, 우리 딸, 아들. 저는 지금 이 순간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사실 지금 이 순간도 엄마 왜 숙제 하냐며 아빠랑 실랑이를 벌이며 뛰어노는 두 아이들과 싸우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두서없이 쓴 내용이라 조금 쑥스럽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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