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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너는 최선을 다했느냐?

작성자
OOO
작성일
15-02-27
조회수
982

너는 최선을
다했느냐?

글 / OOO (본부 79기)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편과 결혼한 지 20년. 그러나 남편과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 ‘이렇게까지 바닥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여자 문제, 시댁의 부조리한 문제, 말만 앞서는 경제적 무능함, 불성실한 가정생활을 꾸려갔다. 남편도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기 싫었는지 가끔은 "밖에서는 다들 나를 인정하는데 집에만 오면 인정을 안 해!” 라고 더 권위적으로 행동했다. 또한 생활비는 없어도 골프와 술은 매일 해야 하는 끝도 없는 허세들을 보여 주었다. 이런 남편의 행동으로 인해 남편에 대한 나의 불신은 천천히, 그리고 급작스럽게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돌아보니 남편은 자녀들과 나에게 차라리 없어졌으면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나는 남편을 향한 무서운 폭탄을 안고 살았고, 그것을 잊기 위해 더욱 일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나의 분노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가되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내 가정의 모습은 정말 나를 슬프게 했다. 우리는 쇼윈도 부부였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 가정의 겉모습을 보며 롤 모델이 되고 싶다고까지 했다. 나도 사회에서는 이런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행복한 척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투명인간처럼 살았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혼하지 않으란 법 있어?’ 내 안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의 기죽은 모습, 웃음이 없어진 분위기. 얼마 후 딸의 친구가 찾아와 엄마, 아빠가 이혼할지도 모른다고 울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린 아이들을 위해 이혼 대신 별거를 시작했다. 아이들에게는 해외출장이 길어질 것이라고 둘러댔다.

어느 날 찾아온 남편이 나에게 물었다. “나에 대한 좋은 추억이 하나도 없어? 나는너를 너무 사랑하는데….” 그 말은 남편의 마지막 애원이었다. 남편의 질문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랑스러운 두 아이를 낳았고, 사는 동안 기뻤던 순간도 있었을 텐데….’ 미움을 상기하며 그를 저주하고 분노하느라 그 좋았던 순간은 기억 속에 묻고 살았다. 내가 이토록 남편을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순간 내 안에서 '최선을 다했느냐’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부부 사이에 누군가의 개입이 필요할 것 같았다.

부부학교가 문득 떠올랐다. 남편에게 마지막 제안을 했다. "이 프로그램이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니 당신은 아버지학교를, 나는 어머니 학교를 가자. 그래서 변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때 정말 끝이야.” 남편은 그것에 동의했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5주 동안 아버지학교를 다니며 아이들에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로 인해 나의 마음도 서서히 열렸다. 나도 어머니학교를 입학하고 강의를 듣다 보니 강사님들의 살아온 세월이 나와 참 많이 닮아 있었다. 또 다른 사람들의 간증을 들으며 나와 다른 삶에 대해 같이 가슴 아파하고, 기도해 주고, 나의 상처를 드러내며 위로를 받으니 내 안의 문제가 해결되고 마음이 평안해졌다. 그러나 삶 속으로 돌아가면 다시금 요동하기를 반복했다.

어머니학교 1주차가 끝날 무렵 남편은 아버지학교를 졸업하던 마지막 주차였다. 그때까지 우리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냈다. 당일, 아버지학교 조원들의 식사를 준비하면서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했다. 아이들의 재촉에 참여한 수료식. 세족식을 하면서 남편의 눈물을 보았고, 진심을 보았다. 남편을 안으라는 사회자의 말이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남편을 안을 수 없었다. 소름 끼칠 만큼 닿는 것도 싫었기때문이다. 남편이 내 손을 잡고 자신의 허리에 내 손을 갖다 대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내 눈에서 폭포수와 같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남편과 화해한 후, 어머니 학교 2주차부터, 강의는 나의 회복을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배움을 통해 남편의 행동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편의 상처를 들여다 볼 수도 있었다. 마음이 열리니 열정도 생겼다. 그리고 용기도 생겼다. 그래서 배운 것을 집에서 바로 적용했다. 나는 어머니 학교 숙제라는 명분을 내세워 가족들에게 내가 꿈꾸던 일들을 자연스레 부탁했다. ‘여보! 부부가 같은 공통점은 있어야 나중에 나이 들어 같이 할 일이 많대.’ 남편은 축구광이었는데 토요일 축구를 포기하고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주로 등산을 가겠다고 약속했다. 남편은 이후로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또 일주일에 한 번은 교회에 나가려고 애쓰고 있다. 얼마 전 아이들의 교회 수련회가 있어서 남편과 함께 저녁예배를 참석했다. 딸아이가 “엄마, 엄마가 바라는 그림대로 되어가고 있네. 축하해”라고 말했다. 그동안 나는 남편과 함께 예배드리는 모습을 그려왔고, 남편은 나와 함께 친구들과 부부동반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그려왔다. 지금 우리는 서로가 원하는 그림의 주인공이 되려고 애쓰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편에게 편지쓰기 숙제를 하면서 완벽주의 아버지 밑에서 그 둘레를 벗어나고 싶었던 내 유년시절의 아픔과 상처들을 털어낼 수 있었다. 편지를 쓰다 보니 원망보다는 감사한 일들이 더 생각났다. ‘나도 사랑받는 딸이었어. 미움만 받았던 게 아니었지….’ 편지를 계기로 부모님과의 회복과 동시에 나의 과거를 다시 정리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사랑스러운 20가지를 쓰면서는 아이들의 사랑스러움을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되었고, 아이들도 아빠와 엄마가 부모교육을 받고 자신들에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더니 점점 밝아졌다.

그러나 남편의 문제가 해결되자 아이들의 문제가 슬그머니 내 삶을 지배했다. 아이들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동안 남편의 문제로 인해 아이들을 바라보지 못했다. 아이들이 우리의 불화 때문에 자신을 표출하지 못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아이들이 등교할 때는 남편과 내가 번갈아가며 허그를 해 주었다. 스킨십이 늘면서 아이들의 짜증과 다툼은 줄고 수다가 많이 늘었다. 허깅할 때마다 마치 체념한 듯 몸을 맡기는 모습은 참으로 사랑스럽다.
숙제 중에서 ‘실실 웃기'는 꼭 지키려고 애썼다. 그러자 사람들이 내가 많이 예뻐졌다고 했다. 또 가족과 있을 때는 개인적인 시간을 가급적 줄이고 새벽과 늦은 밤을 이용해서 내 시간을 만들었다. 나의 생활패턴이 엉망이 되어버려 아직 어수선 하긴 하지만, 가족들이 함께 이야기 하는 시간이 늘고 같은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것은 놀라운 발전이었다. 남편은 주일 예배를 회복했고, 일주일에 한 번 가정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아이들은 성가대를 하기 싫다고 불만이 많았었는데 다시 노력해보기로 했다.

어머니학교를 마치고 ‘해피 맘' 소그룹에 참여했다. '해피 맘'은 원래의 나로 돌아 갈 것 같은 두려움에 대한 도전장이었다. 어머니학교가 나와 가족을 이해하고, 다짐하는 과정이었다면, 해피맘은 좀 더 깊이 탐색하고, 지혜로운 습관을 만들어가는 심화과정이었다. 두 과정을 마치고 나는 더 큰 용기를 얻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러한 변화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남편과 나는 서로 비난하고, 헐뜯으며, 귀와 마음을 닫고 살았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정한 가족의 모습을 꿈꾸었었다. 먼저 손 내밀어 주지 않는다고 서로를 탓했다.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 가족을 안타까워 하셨을까….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시다. 십자가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하나님이 바라는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고 계시고, 오늘도 역사 가운데 계시다. 앞으로 우리 가정이 하나님 안에서 화목하며, 화평하며, 또 주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자들로 성장하기 위해 서로 돕는 자가 되기를 기도한다.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또한 어머니학교를 위해 애써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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