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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용서의 물결

작성자
OOO
작성일
13-12-13
조회수
902

용서의 물결

글 | OOO (본부 71기)

현재 나의 모습은 과거에 나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생긴 결과물이라는 첫 날 강의를 통해 떠올리기 싫은 나의 유년시절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현재를 살아갈 때 과거 따위는 절대 생각하지 않고 현실에 충실하며 미래를 꿈꿔 왔다. 소망을 갖고 살아가면 문제없을 거라는 자신감으로 지금까지 오기로 나의 삶을 살아 온 것 같다.
그러나 어머니학교 첫 강의에서 나는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 속에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상처들로 만들어진 아버지를 그대로 닮아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싫어했기 때문에 내가 절대 아버지를 닮아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할 수도 없었고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은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치욕이다.
나의 과거를 떠올리면 가장 큰 사건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찾아온 불행으로부터 시작이다. 부유한 유아시절을 보냈던 것이 생각이 난다. 주말에는 항상 가족 나들이를 다녔고 단란한 가정이지 않았나 싶다. 늘 엄마가 정성스레 준비해간 나들이 도시락은 내가 평생 잊지 못할 완벽한 피크닉 바구니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탄강으로 우린 여름 휴가를 떠났던 것 같다. 다리 밑에 있는 어떤 유원지에서 즐겁게 물놀이를 하던 것이 생각난다. 같이 놀러 갔던 여러 언니 오빠들과 땅 짚고 헤엄치기 놀이를 한참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나의 오빠가 물속에서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소리를 지르며 입고 있는 옷 그대로 물로 뛰어 들어 소리를 쳤던 기억, 사라진 오빠를 찾으려고 나룻배에서 노를 사용하여 땅바닥까지 젓던 장면, 그러다가 엄마 아빠가 거의 실신하신 상태가 되었을 무렵 오빠의 시신이 물위로 떠올랐고, 그 모습이 오빠와의 마지막 이별의 장면이 되어 버렸다.
누구의 탓도 아닌 그저 물놀이 사고였을 뿐인데 난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 엄마로부터 오빠가 그렇게 사고로 죽은 것이 나의 이름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 강한 이름의 뜻 때문에 장자의 인생이 그렇게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나는 살인자라는 생각에 휩싸여 그 죄책감이 평생을 나의 삶에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사고로 오빠를 잃고 우리 가정은 웃음이 사라졌다. 가족 나들이도 사라졌고, 그 후로 우리 가족은 물놀이를 가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리고 항상 심각하고, 진지하고, 대화도 없고,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갔던 것 같다. 그러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집안에 모든 살림살이에는 빨간 딱지가 붙고 우리는 길거리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집을 구할 수가 없어서 이집 저집에서 신세를 지다가 겨우 단칸방 하나를 얻어 이사를 하게 되었고 그렇게 대학시절까지 가난과 함께 살게 되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먹고 산다고 하는데 우리집은 달랐다. 부도가 난 이후로 아버지는 생업을 포기한 채 기원에서 바둑을 두고 술을 마시며 7-8년 이상을 놀고먹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가 겨우겨우 공장에 다니며 부업을 하셨고 쌀독에 쌀이 없어 걱정하시던 모습들이 기억난다. 어린 시절 갖고 싶었던 거나 입고 싶었던 것이나 하고 싶었던 것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가난한 우리 집 형편 때문에 나는 일찍 철이 들어서 어린 아이 같지 않게 빨리 성숙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그렇게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고 사업 실패의 좌절감에서 헤어 나오시지 못하고 무능력한 아버지로 가족에게 무섭고 무뚝뚝한 아버지로서 그 어떤 것도 해주지 않으셨던 분이셨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버지에 대한 잊지 못할 기억은 내가 유치원 시절 즈음에 출근 하시던 아버지 앞에서 떼를 쓰며 시끄럽게 했다고 발목을 잡고 거꾸로 든 채로 물을 받아 놓은 욕조에 나를 담가 버렸던 사건이 있었다.
나는 그 뒤로 칭얼대거나 떼를 쓰거나 울거나 보채는 일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랬다간 또다시 물속에 빠져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렸지만 참 속이 깊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늘 착하고 참하고 모범적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던 것 같다.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아빠의 손에 다시 그런 일을 겪게 되는 공포감에 휩싸여 살았던 것 같다. 나의 유년시절을 그 두 사건을 통해 아버지와의 관계는 단절되고 깨지고 상처투성이로 잠자고 있었다. 그렇게 자라 와서 그런지 20대가 되어서도 미팅 한번 하지 않고 남자는 관심도 없었다.
무책임한 아버지, 나를 물속에 담가 버렸던 아버지, 가족을 돌보지 않고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의 잘못된 그림자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남자를 혐오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독신주의로 혼자 살겠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오다가 중학교 동창이자 동네 친구인 현재 남편과 10년 정도의 우정을 바탕으로 장난 같이 쉽게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의 결혼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신앙생활을 참으로 잘 한다고 믿었던 남편은 사회생활을 한다는 핑계로 하루건너 술에 취해 들어오고 때론 동이 터서 집에 들어와 옷 만 갈아입고 나갈 정도로 술과 더불어 살아갔다.
나의 아버지가 매일 같이 술과 더불어 살아오셨던 것 같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술을 친구삼아 살아가는 그 모습이 너무나 싫었다. 게다가 우리 남편은 교회에서 예배 인도자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이중적인 삶을 사는 것은 나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남편을 매일같이 정죄하고 비난하고 공격했다. 주중에는 술과 더불어 살고 주말에는 축구 동호회에 빠져 가정을 돌아보지 않는 남편의 모습 속에서 무책임하게 가족을 돌아보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된 것 같다. 무책임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싫어서 결혼이란 걸 생각도 안했던 나였는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엄마의 삶과 무엇이 다르나 싶어 늘 자괴감에 빠져 살았다. 내가 꿈꾸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전혀 아닌 것이 나를 폭발하게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모든 스트레스가 사랑스런 나의 두 아이에게로 전가 되었다.
남편에게 받은 스트레스, 시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모두 내 아이들에게 풀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며 몸부림치며 하나님께 날 고쳐달라고 울부짖으며 기도했지만 나의 분노와 짜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 자신을 수술대 위에 올려놓는 심정으로 어머니학교에 등록하게 되었고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 앞에 나를 고쳐 달라고 내려놓은 그 순간 하나님은 나를 위로하시며 나의 눈물을 닦아 주셨고, 유년시절 그 때 그 사건 속에서 나에게 속삭이며 나를 안아주시고 위로하시고 나의 아픔을 함께 해 주셨다.
오빠의 죽음이 나의 이름 때문이라는 죄책감, 가난을 통해 얻은 억눌림, 단 한번의 아버지의 폭력, 술이 없으면 살 수 없으셨던 아버지의 인생, 이 모든 것이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 위한 스토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죄까지도 선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제는 무엇인지 조금씩 알 수 있을 것 같다.
죽을 것만 같았던 과거의 아픈 상처들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 상처를 싸매시고 치유하시며 그것을 통해 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조금씩 느껴진다.
첫 날 강의 시간에 날 위로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집에 돌아와 그 동안 아이들에게 모든 스트레스를 풀었던 나의 부족한 모습을 용서하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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