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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떠남을 위한 결혼

작성자
이미순
작성일
12-12-07
조회수
1,042

진정한 떠남을 위한 결혼

글 이미순(전주 2기)

‘떠나보냄’이라는 단어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의 친정어머니는 외손녀딸이 결혼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너무 기뻐하셨다. 하지만 친정어머니는 81세 되시는 2007년 9월 1일 아침에 갑자기 소천 하셨다. 소천 하시기 3일 전에 어머니는 나에게 전화를 하셔서 뜬금없이 “잘 먹고 잘살아.” 하셨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응. 그런데 엄마 나 지금 일이 있어 나가는 중이야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하고 나갔다. 들어와서 전화를 못 드렸다. 그 전화가 마지막 인지도 모른 체 무심한 나의 행함이 어리석었던 점을 지금 와 후회를 해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을… 또한 소천 되시기 약 15일 전쯤에 딸과 함께 친정에 가서 엄마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며 ‘왠지 곧 돌아가시지 않을까?’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느낌을 뒤로한 체 “엄마 외손녀딸 결혼할 때 오세요.”했더니 “나 못가.”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이 서울에 사시는 어머님이 전주까지 내려오시기가 불편하시다는 소리로 알아듣고 “오빠가 어련히 잘 모시고 오실 텐데.” 괜히 그러시는 걸로만 알았었다.

하지만 친정어머니는 그리도 아끼고 사랑 하셨던 외손녀딸 결혼식을 보지 못하고 떠나 가셨다. 평소 어머니는 나에게 “잠자듯이 천국가면 얼마나 복이 되겠니?”하시면 나는 “엄마 기도하시면 되죠.”하면서 정말 그렇게 편안히 가심에 대해 대화하면서 “주님 고대가” 등 찬양 곡들을 함께 부르곤 하였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정말로 전날에도 노인정에 가셔서 손수 점심 준비를 하시고 손자에게 노인들 대접하게 야쿠르트 좀 보내달라고 부탁을 해서 풍성하게 노인들 접대를 하시고 집에 오셔서 손자에게 좋은 거 많이 보내줘서 고맙다며 저녁을 잘 드시고 주무셨다고 한다. 또한 다리가 불편 하셔서 새벽기도를 못 가시고 집에서 기도를 하셨기 때문에 그날 새벽에도 평소처럼 일어나 새벽기도를 하시는 어머니의 인기척에 오빠 부부는 항상 그 시간에 한결같이 우리 어머니 일어나셨네 하셨단다. 하지만 “어머니 아침 드세요.”해도 대답을 하지 않고 일어나시지 않아서 보니 어머니는 소천되신 뒤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떠남을 준비를 하셨고 우리 자식들은 떠나보내 드릴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머니의 떠남은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멍한 상태에서 장례를 치루고나니 어찌 그리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지 말로는 표현 할 길이 없었다. 어머니가 깔고 주무셨던 요 밑에는 잔돈 칠천 원과 주님 고대가 가사를 손수 쓰신 종이 한 장이 있었다. 아마도 어머니는 늘 상 주님 만날 준비를 하시며 그 방 그 자리에서 그날도 언제나처럼 주님과 대화 하시다가 큰 고통 없이 홀로 떠나 가셨다.
양 옆방에 오빠 부부와 손자 부부를 두고도 혼자 외로이 그렇게 나를 이 땅에 오게 하신 어머니는 떠나 가셨다. 어머니 자랑을 좀 하자면 독실한 불교 집안에 큰 며느리로 아침에 일어나면 샘에서 새 물을 길어와 정한수 떠서 부뚜막에 올려놓고 자녀들을 위해 두 손 모아 빌며 하루 일과를 시작 하셨다.

그러한 어머니는 초등학교 가기전인 나와 언니를 곱게 단장을 해서 교회에 보내셨다. “교회가 더 좋은 곳 이라더라. 그러니 너희는 교회를 가거라.”하시며 헌금 100원씩을 주셨다. 그렇게 아주 어릴 적 다니던 교회를 집안이 불교 집안이므로 나는 초등학교 시절을 다 보내기 전에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나 역시 아침이면 일어나 정한수를 떠서 올려놓는 엄마의 모습처럼 그 습관이 몸에 배어있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내 친구를 통해 17살 되는 어느 여름에 다시 부르셨고 나는 우상에 대해 눈을 뜨게 되니 어머니 절에 가신 틈에 부뚜막의 정한수 물을 갔다 버리고 장독대에 그릇을 엎어 두었다. 어머니는 절에서 돌아와 그 그릇을 보고 깜짝 놀라셨다. 나는 하나님과 우상에 대해 어머니께 설명을 드렸더니 어머니는 곧 바로 “한 집에 신이 둘이 있으면 되겠니? 그러면 내가 절에를 가지 않으마.” 하셨다.

그렇게 자식이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편을 들어 주시고 너무나 상대방 존중을 많이 하셔서 늘 상 우리는 불편했었다. 그러한 마음 가짐이셨기에 죽음 또한 당신 혼자 외로이 맞이하셨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파 와서 어머니를 마음에서 보내 드릴 수가 없었다.
나는 어머니를 빨리 보내 드려야 딸 결혼식을 치룰 수 있다는 마음으로 이 세상에 안 계신 어머니에게 서운하고 화가 막 났었다. 오빠 한 분에 아래로 딸 4명을 키운 어머니는 언제나 항상 모든 삶이 오빠 중심이셨다. 그래서 “오빠 (아들 둘이 2008년 가을과 2009년 봄에 결혼을 함) 조카들 결혼식에 혹시라도 당신이 피해 될까봐 그리도 노심초사 애를 태우시더니 내 집에 좋은 일 눈 앞에 다가오는데 그렇게까지 큰 상처를 주실 수 있나요?”하며 원망을 하면서 독하게 마음을 다 잡아 먹지 않고는 딸의 떠나보냄을 준비 할 수가 없었었다.
그렇게 준비되진 않은 친정어머니 떠나보냄에 딸 역시 유난히도 할머니와 친하게 지내며 나에게 하지 못한 말들을 할머니에게 하면서 살아가던 참 이였기에 떠나갈 준비를 전혀 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기도 동역자가 되어온 딸을 평안히 행복하게 떠나보냄을 하지 못하고 친정 집안 분위기가 모두 다 우울한 상태였기에 언니, 동생들에게 “이제 밥 좀 먹고 힘내서 아이(딸 이름이 아이임. 마:18:3 말씀처럼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험난한 세상에서 오염되지 않고 주님의 자랑스러운 딸로 살아내길 바라는 마음에 아빠가 지어줌.) 시집보내는 일 좀 하자.”며 이야기 하여 우리 모두 다 억지로 밥들을 먹기 시작했었다. 딸 역시 목회자 아내로 살아가야 할 훈련이 결혼식 준비부터 시작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결혼 예비학교를 가도록 권유 했더니 딸은 당연히 가야 하는 걸로 알고 있었으나 그 당시 예비 사위는 다 알고 있으니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딸에게 전해 주라며 “만약 결혼 예비학교를 수료하지 않으면 너를 줄 수 없다고 말해.” 반 협박을 해서 어렵게 보냈다.(이 글을 통해 한은경 본부장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토요일이 바쁜 부교역자 생활을 잘 알지만 둘이 하나가 되는 과정이므로 나는 강요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반응은 정말 결혼 전에 꼭 결혼예비학교를 수료해야 한다며 지금은 홍보 대사가 되어있다.
문자적으로 딸을 떠나보냄은 호적을 파서 시댁으로 옮겨감이 있다. 하지만 사위를 맞아들인다는 말이 어울리는 세대 속에서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2007년도 어느 봄 날, 그 무언가 자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기록해서 결혼하여 떠나보낼 때 주려고 전주 한옥마을에서 한지로 된 노트를 사다두고 무슨 말을 어찌해야 할지 망설이는 동안 세월이 흘러 2009년도 2월에 딸이 선을 보게 되었다. 왠지 그 해는 결혼을 하여 내 곁을 떠나 갈 것 같은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이 간직해온 노트를 꺼내어 2009년 2월 21일 새벽 3시에 “사랑하는 딸 아이야.” 시작된 글이 아직도 한 권의 노트를 완성하지 못해 전해주지 못하고 있다.

2007년 11월 7일 딸은 결혼하여 우리 곁을 떠나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그 가문으로 족보가 옮겨 갔다. 그 해 나는 딸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들을 열심히 한 줄 한 줄 글을 써 내려갔지만 결혼식 날 예식장에서 전해 주지 못함이 그때는 아쉬웠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는 떠나보냄이 아니었고 결혼 후 부터가 떠나보냄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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