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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사랑의 회복

작성자
김란영
작성일
12-05-21
조회수
980

 

감사와 사랑의 회복

글 | 김란영(연변 어머니학교 3기)

벌써 나도 서른 넘은, 아이 셋을 둔 엄마이다.
가끔씩 내 아이들을 보면서 “정말 내 새끼들 맞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는 어릴 적 무남독녀 외동딸로 어른들의 예쁨을 듬뿍 받으면서 자랐다.
내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는 할아버지, 할머니, 엄하시면서도 딸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신 아버지, 활달하시고 항상 긍정적인 어머니, 우리 가정은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만끽한 행복한 가정이었다. 원산신학교를 졸업하시고 만주 땅에 선교사로 오신 증조할아버지로부터 시작해 우리 가정은 4대째 예수 믿는 (예수쟁이)가정이었다. 어릴 때부터 찬송밖에 부를 줄 모르고,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옛 이야기는 성경의 위인전들이었다. 또한 증조할아버지의 순교 이야기는 우리 가문의 자랑이었다. 아직도 기억에 난다. 소학교 1학년에 입학해서 붉은 넥타이(소선대원)를 선생님이 한 친구 한 친구의 목에 매주실 때였다. 다른 친구들은 소선대원이 되어서 기뻐하며 좋아하는데 유독 나만 소선대원 하지 않겠다고 선생님께 말씀 드렸다. 그 이유인 즉, 나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소선대원이 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담임선생님이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이렇게 나의 어린 시절은 교회, 집, 학교가 전부였다. 내가 중학생이 되면서 아빠가 동북신학교에 입학하시게 되었다. 엄마와 나는 연길로(그 전에는 도문에 거주)이사 오게 되었다. 그 이유는 내가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피아노를 전공하면서 항상 아빠는 학교 선생님이 주신 숙제 외에 찬송가를 4성부로 연습하는 숙제를 내 주셨다. 그렇게 아빠 말씀대로 4성부를 익히게 되어 14살 때 연변 최초, 최연소 반주자로 연길교회 모든 반주를 도맡아 하게 되었다. 예술학교에 다닐 때 아빠가 항상 해주신 말씀이 생각난다. “너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피아노를 배우는 것이다.” 그 말씀을 듣고 성장해서인지, 교회에서 반주하는 것은 나의 임무가 아니라 의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항상 교회 일이 최우선이었다. 내가 16살 되던 해, 이렇게 행복하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 받는 나에게 큰 변화가 찾아왔다. 부모님이 나보다 10살 어린 여동생을 입양하게 되었다. 그 아이는 너무 예쁘게 생겼다. 얼굴도 작고, 쌍커풀 눈에, 보기만 해도 인형같이 예뻤다. 하지만 난 그 동생이 세상에서 제일 미운 동생이었다. 그 이유는 내 사랑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로부터 1년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집도 가지 않고, 어긋나기 시작했다. 반항하고 싶었지만 그 시기에 아빠가 교회를 개척했기 때문에 교회의 모든 반주, 성가대 등 이런 일은 나밖에 할 사람이 없어서 사람들 앞에서는 착한 목회자의 자녀로, 집에서는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반항아로 살아갔다. 그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못 받는다고 착각해서일까? 어린 나이에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학교의 선배로 만난 남자는 비록 나보다 8살이나 연상이었지만 너무 멋있었다. 오빠같이 다정하고, 아빠같이 푸근했다. 내가 이렇게 방황하고 있을 때, 아빠는 나에게 아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아빠 역시도 태어나서 2일 만에 입양되신 분이시라고, 그리고 입양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택함을 받아 목회를 하시게 된 것이라고 하시면서 우리는 다 고아 같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면서 동생에 대한 나의 마음을 열게 해 주셨다. 그리고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도 받아 주셨다. 그리고 1년이 더 지난 봄, 부모님은 나보다 17살 어린 남동생을 입양했다. 물론 여동생을 입양했을 때 보다는 마음이 열려 있었다. 신앙이 없는 남자친구를 성장시키기 위해 아버지는 남자친구를 기도와 말씀으로 훈련할 수 있는 기도원 생활을 2년 하게 했다. 남자친구는 두말할 것도 없이 순종하며 감사해 했다. 아마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 그랬을 것이다. 2년의 기도원 생활을 마치고 남자친구는 3년간 관리책임자 일을 하다가 2000년 함께 총신대학교 신학과에 나는 교회음악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2000년, 그때 내 나이 22살, 그이는 30살, 우리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첫 아이도 낳게 되었다. 부모의 기도가 없었다면 나는 그 방황했던 10대를 잘 견뎌 내지 못했을 것이며, 부모님의 격려가 아니었다면 우리 부부는 결혼까지 오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중국의 작은 도시에서 남편은 목회하며 하루 8시간씩 성경을 보고 쓰는 일에 충성을 다하며, 나는 연변의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전달하는 교육 사업가로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
나이 어린 엄마로서 자녀들에게 상처도 주고 또 무조건적인 사랑도 못주던 나에서 이제 어머니학교를 통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자녀를 사랑하고 또 자녀를 하나님이 주신 기업으로 진정 생각하면서 좋은 엄마 되기에, 행복한 엄마 되기에 매순간 순간 노력한다. 내가 나 된 것은 나로 인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인함이라는 말씀을 항상 마음에 새기며 순간 순간 나에게 맡겨진 일이 임무가 아닌 의무를 다 하면서 살아가는 지금, 나는 너무 행복하고, 또 너무 감사하다.
또한 전도가 용의하지 않는 중국에서 어머니학교를 통해, 보잘 것 없는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많은 어머니와 가정의 복음화가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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