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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창을 통해 바라 본 나의 어머니 나의 가정

작성자
이광만
작성일
11-10-10
조회수
917

창을 통해 바라 본
나의 어머니 나의 가정

글 이광만(원광대 의대 교수)

인생을 살아가면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에 소중한 시간들을 다 허비한 다음에야 비로소정말 가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고 후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급한 일과 중요한 일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은 많이 들어왔지만 사실 이것처럼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없는 것 같다. 왜 인생에 정말 소중한 것들은 아우성치지도, 우리를 다그치지도 않고 마치 처분만 기다리는 하인처럼 한 켠에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 것인지, 그래서 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나중에야 후회하게 만드는지 알 수 없다. 두란노 어머니학교에서 어머니와 가정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새삼 나의 가족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중에 문득 든 생각이다.‘ 가족’이야말로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첫 번째 축복이자 가장 소중한 선물인데도 늘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이고 세월이 지난 후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 가족이 아닐까? 이제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후반전을 시작하면서 그동안의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지극히 평범한 나의 가족 이야기를 어머니학교 회원 여러분과 나눌까 한다.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면 우리 집은 6.25 직후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그래도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던 단란한 가정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형편이 어려운데다 위로 누나 두 분과 동생이 셋, 6남매가 학교를 다녔으니 많이 힘드셨을 텐데 어머니는 별로 내색하지 않고 우리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하시면서 뒷바라지 하셨다. 어머니는 낮에는 고되게 일하시고 밤에는 오래된 재봉틀로 직접 천을 사다가 우리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그래서 비록 살림은 어려웠지만 옷은 깨끗이 잘 입고 다녔다.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셔서 한글을 읽고 쓸 줄 모르셨는데 교회에 나가시면서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으로 밤마다 종이에 한 글자 한 글자 쓰시면서 한글을 혼자 깨우치셨다. 어머니가 쓰신 편지를 읽어보고 틀린 데를 고쳐드린 기억이 새롭다. 이렇게 배우신 글로 80세가 넘으신 지금도 날마다 성경을 읽고 노트에 필사하고 계신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걸어서 15분 쯤 걸리는 교회에 다니던 추억이다. 옷을 갈아입고 준비하고 있다가 예배 30분 전에 첫 종이 울리면 어김없이 집을 나서 교회로 가곤 했었다. 중·고 시절 여름방학 때에는 가끔 어머니와 함께 새벽기도회에 가기도 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동 터오는 새벽길을 걸어 집에 돌아올 때 느꼈던 알 수 없는 평안함은 신앙생활의 묘미를 조금씩 깨닫게 해주었다. 덕분에 교회생활은 내 인생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고등부 때에는 교회학교 교사와 어린이 성가대를 맡아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는 주간에도 쉬지 않고 봉사 했었다. 고3이 되면서 교회봉사를 그만두었던 친구들은 대부분 시험에 실패했는데 교회봉사를 계속했던 내 가까운 친구와 나는 함께 의과대학에 바로 합격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고, 이 일이 교회후배들 뿐 아니라 나의 인생에도 좋은 교훈이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연세가 많고 말씀이 없으신 데다 엄격하신 편이어서 늘 어려웠던 것 같다. 사춘기를 보내면서 가끔 아버지께 반항하는 마음이 들어 방에 혼자 앉아있을 때에는 어머니가 방에 들어와 조용히 타일러 주시곤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전주예수병원에서 전공의 수련을 받던 시절에 병원내의‘Evening Choir’라는 병실순회 찬양모임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한 해에 큰 아이가 태어나고 3년 후 군의관 시절에는 둘째가 태어났다. 당시 바쁜 전공의 시절이었고 군의관도 전방에서 보냈기 때문에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늘 아내 몫이었다. 자녀교육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 부족한 남편이었지만 아내와 자주 얘기를 나누었던 것 한 가지는 우리 아이들이 성공한 아이가 아니라 행복한 아이, 부러운 사람이 아니라 그리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아주 소박한 바램이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병원에 부임한 후의 생활은 수술과 진료, 논문, 학회참석 등 그야말로 쉴새없이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거기에다 주일마저 교회일로 바쁘게 지내다보니 가족은 늘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40대 중반 어느 날 안과교수로 부터‘노안’이라는 진단을 받고 안경을 쓰게 되면서부터 조금씩 책과 논문을 벗어나서 다른 것들을 향해 시선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던 것 같다.
퇴근 시간을 조금 앞당기고 주말에는 될 수 있으면 가족과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일 중심으로 바쁘게 살 때에도 아내는 비교적 잘 이해해 주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바쁜 남편과 훌쩍 커버린 아이들 사이에서 외로웠던 아내는 나의 이런 변화를 누구보다 반겨주었다.
지금은 아이들이 둘 다 집을 떠나고 벌써 7년 째 아내와 둘이서 지내고 있다. 토요일은 가급적 아내와 함께 가까운 산이나 수목원 같은 데에 나들이를 가거나 어머님을 찾아뵙기도 하면서 가족과 함께 휴식하는 날로 정해 지키고 있다. 또 주일은 예배를 드린 후 아내와 함께 중국인교회와 청년국을 섬기면서 하루를 보낸다. 따라서 토요일과 주일 이틀간은 거의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셈이다. 1993년부터 매년 해외 단기의료선교에 참여하고 있는데 1997년부터는 늘 아내와 함께 참여하고 있다. 그 후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도 덜하고 부부가 함께 같은 사역을 할 수 있어서 부부는 한 몸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결혼 30주년이 되어서야 실감하고 있다.
아내에게 고마운 것은 참으로 많지만 특별히 나와 아이들, 그리고 모든 가족을 위해서 매일 시간을 정해 기도해주는 것은 너무 고맙다. 때로 어려운 수술이 있는 날은 출근하면서 꼭 기도를 부탁한다. 그리고 수술이 끝나면 잘 끝났다고 아내에게 문자로 알려준다. 아내는 예전에 어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나와 아이들 사이에 갈등이 생길 때에는 늘 중보자와 중재자 역할을 잘 해준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지만 날마다 가족을 위해서 기도해주시는 어머니가 계시고 아내가 있기에 거칠고 힘든 세상살이를 더 잘 이겨내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p r o f i l e
이광만 (Lee Kwang-Man)
현 원광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외과학 (유방암, 갑상선내분비외과)전공. 1978년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1992년 의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유방암학회 부회장(2009-현재), 대한갑상선내분비외과학회 상임이사(2002년-현재), 대한암협회 전북지부장(2003-현재). 미국 M.D. Anderson 암센터(1988)와 미국 H.Lee Moffitt 암센터(2000) 해외연수, 2007 보건복지부장관상, 2009 국무총리상(암예방의 날) 수상. 대한예수교장로회 이리신광교회 장로(2002년 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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