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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선빈(거제 열린 1기)
어머님, 당신과 나 이렇게 한 울타리 속에서 같이 동고동락 한지도 34년이란 세월이 흘렀군요.
스물 두 살의 꽃다운 나이로 서른 살의 당신과 결혼해서 수많은 희로애락이 있었습니다.
해외 취업을 앞둔 당신은 아주 급했었죠. 홀로 계실 어머님 때문에 저를 만나 보름 만에 결혼을 하고 보름 후에 당신은 이란으로 떠나셨습니다. 당신의 얼굴도, 목소리도, 숨소리까지도 한없이 낯설기만 한데 어머님과 둘이서 어찌 살라고 말입니다.
결혼할 때 저는 혼수가 없었습니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 혼자서 그 험한 농촌 일을 감내하시며 힘들게 사시는데 차마 말문이 떨어지지 않아 목화솜으로 된 어머님 이불만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체면 구기고 왔습니다. 흔쾌히 당신도 긍정적으로 응대해 주었으니까요.
이 지면을 안 빌려도 혼수 안 해온 대가를 당신 없는 동안 어머님한테 얼마나 혹독하게 치러야 했는지 잘 알고 있지요? 지난 날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찌 살았을까?’ 꿈만 같습니다. 명절에도 친정집에 못 갔고 요즘 흔하게 하는 생일 이벤트도 없었어요. 당신과 나 사이에 행복을 논한 적도 없었고 신혼의 꿈조차 꿀 수 없었지요. 왜냐면 당신이 귀국하기 한 달 전에 어머님은 저를 친정집으로 내쳤고 연락할 때까지 오지 말라 해놓고 당신 귀국함과 동시에 어머님께서는 저와의 이혼을 요구하셨죠. 꼼꼼하고 신중한 당신은 끝까지 그 요구를 뿌리치고 저를 받아들이셨어요.
어머님은 열아홉의 나이로 당신을 잉태하셨고 모성본능이 유난히 강하셨기에 며느리를 딸처럼 품으실 수는 없었던가 봅니다. 당신 역시 효성이 너무 지극해서 아직까지도 저는 불만입니다. 살면서 늘 저는 당신과 어머님 사이에서 설 자리가 없을 만큼 제 가슴은 구멍 난 것처럼 허했어요.
당신은 늘 지금까지도 어머님 편에 서서 날 핀잔하고 어머님 또한 늘 당신 편에 섰기에 2대1 로 싸울 땐 늘 저는 가슴이 터져 죽을 뻔 했답니다. 결혼하고 지금껏 저는 당신의 아내로 살질 못하고 동생으로만 산 것 같아요. 당신을 위해 속옷도, 외출복도, 보약도, 음식도, 모두 어머님의 소관이었으니까요. 저는 당신에게 늘 빈껍데기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허리 수술하고 심한 우울증에 시달릴 때 저는 미친 듯이 내 자신을 표출하기 시작했죠. 당신 사랑도 어머님이고 내 두 아들의 사랑도 어머님이란 생각에 아내의 자리 엄마의 자리를 달라고 몸부림치며 울부짖었고 내 살림도 이제 내 것이니까 내놓으라고 최후의 발악을 하기도 했지요. 늘 당신을 콩 볶듯이 달달 볶고 당신도 자식들도 다 필요 없으니 혼자 살게 해달라고 울면서 걸핏하면 당신을 괴롭혔습니다. 어머님께선 이런 저를 이해 하기는 커녕 하나뿐인 동서한테까지 나의 모든 허물을 쏟아내고 무시하셨지요. 이성을 잃고 몸부림치며 막무가내인 저를 당신은 달래주기 시작했고 헌신적으로 골수에 맺히도록 가슴이 곪아 터진 저를 걱정하며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죠. 관심을 제게 쏟아주셨지요. 제게 올인 해 주셨죠.
그때의 당신을 잊을 수가 없답니다. 최고의 남편이었어요. 저도 여자랍니다. 감수성도 예민하고 다른 부부처럼 행복한 여자로 거듭나고도 싶었습니다. 그래서 늘 당신과 헤어지는 꿈을 꾸었고 어머님 모실 자신이 없어서 당신과 헤어지고 이 복잡한 공간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적도 많았었지만 차마 어머님과 따로 살림내서 살자는 말은 입 밖에 낼 수 없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큰오빠의 사정으로 친정엄마가 우리 집에 2년 동안 계시게 되었는데 생각 외로 당신께서 어머님과 차별 없이 장모님을 잘 대해 주셨어요. 늦었지만 고마움을 전합니다.
제가 왜 어머님과 따로 살게 해달라고 말 못하는지 그 이유를 말할게요. 윤수가 몇 년 전 군대에서 휴가 나왔을 때 어머님과의 갈등으로 제가 하염없이 울고 있는 걸 보고 제 두 손을 꼭 붙잡고 한참을 기도하고 나서는 이렇게 말했어요. “엄마! 아무리 힘들어도 할머니를 버리지 마세요. 할머니는 길면 10년 밖에 살 수 없지만 엄마는 제가 잘 모실게요.”라며 새끼손가락을 제게 걸며 약속을 청했을 때의 간절한 윤수의 눈빛을 저는 보았거든요. 할머니를 사랑하는 손자의 진실한 사랑을요.
당신이 정년퇴직하고 집에 있으면서부터 제 마음은 평온해졌어요. 당신과 어머님이 늘 대화하고 같이 움직이고 그러니 어머님께서는 저에게서 관심이 멀어지기 시작하셔서 갈등이 줄어들 수 밖에요. 그리고 저도 이제는 당신한테 공주대접을 받고 있잖아요. 커피 타주고, 설거지 해주고, 청소 해주고, 집안 쓰레기 분리수거 해주고, 밖에서 제가 마음껏 활동하고 즐길 수 있도록 팍팍 밀어주고…. 지금은 주위에서 나만큼 행복하게 사는 여자도 없는 것 같아요. 제가 꿈꿨던 여자가 되어가고 있나 봐요. 신혼시절부터 행복이 뭔지도 몰랐던 제가 이제 쉰하고 중반이 넘은 지금 그 행복을 진하게 느끼고 있어요. 기타를 열심히 배워서 당신을 위해 당신 생일날 멋진 노래로 이벤트 해 드릴게요. 우리 아들한테도 꼭 말 할 거예요. 엄마는 너하고의 약속을 꼭 지키겠노라고….
사랑하고 또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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