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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용서를 통한 회복

작성자
송명숙
작성일
11-11-25
조회수
869

용서를 통한 회복

글 송명숙

저 에게는 완벽주의 기질이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늘 잘한 것을 칭찬하기보단 잘못했을 때 주로 야단치시면서 “그런 것도 제대로 못하면서 나중에 뭘 잘할 수 있겠냐”는 말씀을 늘 하셨던 분입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어느 날 아빠가 통장과 도장을 주면서 돈을 찾아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근데 그 우체국은 가까운 곳에 있는 게 아니라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두 시간쯤 가야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동생과 함께 저는 실수 하지 않으려고 무지 신경 쓰면서 돈을 찾으러 갔습니다. 저는 돈을 무사히 잘 찾고 어린 나이임에도 잊어버리거나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통장과 돈은 내가 잘 챙기고 도장은 동생에게 단단히 일러주면서 잘 간직하라고 주머니 깊은 곳에 넣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우리 집에 오는 버스까지 잘 갈아타고 내리면서 동생에게 도장 달라고 했는데 그만 도장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아무리 찾아도 없었습니다. 울면서 동생에게 “잘 간직하라고 했잖아.” 하면서 아빠에게 야단들을 것을 엄청 걱정하며 집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역시나 아빠는 많이 야단치셨습니다. 바보같이 그런 것 하나 제대로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기억은 그때도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제 위로 오빠가 둘인데 두 오빠에게 마당에서 마구 맞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뭔가 잘못했던 것 같습니다. 근데 그 장면을 엄마가 마루에서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맞으면서 엄마가 나를 도와주기를 바라면서 “엄마”하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근데 엄마는 그때 두 오빠에게 “죽여 버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근데 그게 그 순간 엄청난 충격을 받아 내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가 몹시 화가 나 있어서 그랬던 것 같은데 ‘죽여 버려라’ 그 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입학 전 5~6세 정도 됐을 때인 것 같은데 지금 기억으로는 엄마와 할머니가 심하게 다투었던 것 같습니다. 엄마가 몹시 화가 났는지 죽어버린다고 농약을 쌓아둔 곳으로 막 가니까 어린 제가 울면서 엄마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엄마가 어떻게 될까봐 두려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의처증이 있었습니다. 엄마는 시집와서 몇 년간은 둘째부인을 둔 할아버지 때문에 밥 먹는 것조차 눈치 보며 시집살이를 심하게 하셔서 빼빼 야위어 가고 첫애를 8개월 만에 양수가 먼저 터져 애를 낳았지만 사산되었습니다. 근데 할아버지는 그것을 아버지를 불러다가 엄마가 시집오기 전에 뭔가 다른 사람과 관계가 있었던 거라고 말씀하셔서 그때부터 아빠는 엄마를 이상하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멀쩡한 정신일 때는 괜찮은데 술만 드시면 사람이 눈빛부터 무서워지면서 달라졌습니다. 그럴 때는 엄마는 거의 산송장이 되도록 맞았습니다. 어릴 때는 주로 자식이 없는 곳이나 우리가 자는 사이에 일이 일어났습니다. 엄마는 그렇게 맞아도 그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우리를 대하셨기 때문에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의처증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냥 부부 싸움하다가 그러는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때리는 아빠가 싫어서 결혼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절대로 때리는 남자하고는 못산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엄마가 워낙 그런 걸 드러내는 걸 싫어하시는 분이라 연세도 드셨으니 괜찮은 줄 알았고 두 분이서 티격태격 하시지만 잘 살고 계신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엄마가 저희 집에 오셨습니다. 근데 모습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때가 모내기철이었는데 얼마나 맞았는지 여기저기 피멍이 너무 심해서 병원에 입원해야 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 살아온 세월을 큰딸인 저에게 그제야 이야기 하셨습니다. 눈물로 이야기 하시는 엄마를 보며 왜 그렇게 미련하게 살았고 살지 말고 나오지 왜 그렇게 살았냐고 목 놓아 같이 울었습니다. 내 안에 아빠를 향한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솟았습니다. 당장이라도 쫓아가서 어떻게 해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엄마를 내가 따로 모셔야겠다고 생각하고 남편도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엄마 없이는 밥도 차려 드시지 못하는 아빠가 전화를 했습니다. 저는 엄마는 내가 모실 테니 엄마 찾지 말고 혼자 잘 사시라고 하면서 냉정하게 끊었습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절대로 갈 생각하지 말고 다시 아빠한테 가면 나랑 인연 끊고 살자고 모질게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엄마는 결국 일주일 만에 다시 갔습니다. 자식인 저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가을 추수 때에 정말 크게 일이 터졌습니다. 밤 11시쯤 됐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명숙아 나 죽는다.” 자려다 말고 광주에서 순천까지 50분 거리를 어떻게 갔는지 전속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날도 얼마나 맞았는지 목은 피부 안으로 피가 터져 고여 있고 머리는 얼마나 시멘트 바닥에 쳐댔는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습니다. 광주로 엄마를 모시고 다시 돌아와 남편 싸이에 글을 남겼습니다. 그 순간 나의 솔직한 맘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그때 남편은 먼저 싱가포르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남편의 답글엔 살기가 느껴지고 무섭다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야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용서가 안 되었습니다. 이틀 뒤에 이혼을 시키려고 순천으로 혼자 내려갔습니다. 가서 자식으로서는 할 수 없는 행동과 모진 말을 퍼부어대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올라오는 차속에서 내가 퍼부은 말과 행동 때문에 서럽게 울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약속과 함께 한번만 더 그러면 싱가포르로 엄마모시고 가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이곳에 와서는 잊고 살았습니다. 어쩌면 생각하기도 싫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근데 어머니학교 여러 과정을 통해 용서해야한다는 그래야만 회복이 일어난다는 사인을 자꾸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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