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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천년을 하루 같이

작성자
김희선
작성일
14-12-05
조회수
939

천년을 하루 같이

글 | 김희선(일산 23기)



사랑하는 여보!
계절이 너무도 예뻐요. 당신과 함께 달렸던 가로수 잎들이 초록 옷에서 노랗고 빨간 옷들로 바꿔 입고 있네요.
샴 쌍둥이처럼 어디든 같이 했는데….
이젠 이 좋은 것들을 혼자 바라보게 되었네요.
요사이 당신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도 못자고 애간장이 녹듯 애가 타 아파합니다.
처음 당신 만났을 때는 첫 인상이 너무 차가워 얼른 그 자리를 피해 버리려고 했는데…. 그런 나를 보고 당신은 “희선 자매 서울대 나왔어요?, 집이 재벌이에요? 미스코리아 출신이에요?”라며 “왜 그렇게 튕기냐?”고 했죠.
그땐 그 말이 어찌나 귀에 쏙쏙 들어오며 제 자신을 겸손하게 하던 지요.
당신이 이끄는 대로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했죠.
두고두고 잘한 결정이라 여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당신은 무슨 용기로 있는 그대로 맞이했는지요. 당신은 저보다 우리 친정 가족들을 더 신뢰하고 좋아하셨죠.
그렇게 당신은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셨습니다.
막내사위라기 보다는 막내아들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중1학년 때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따뜻한 밥이나 따뜻한 눈길조차 그리웠던 당신. 그런 당신을 우리 가족들이 전폭적으로 사랑으로 지지하며 당신이 하고자 하셨던 개척 목회도 동역자들이 되어 함께 했었죠.
여보!
삯군이 아닌 주님의 일꾼이 되겠다며 좋고 편한 일 마다하고 교회 개척한지 13년. 교인과 교회가 당신 삶에 1순위였는데….
마지막 눈 감는 순간에도 교회를 걱정했던 당신. 여보,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의 교회가 아닌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
사랑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당신에게 배웠습니다.
자존감이 없었던 나를 사랑으로 회복시키고 사역의 현장에서 함께 동역하기에 늘 신뢰함으로 기다려준 당신. 퇴원하고 집에 돌아와 빨래 건조대의 낡은 내 속옷을 보며 미안한 마음에 한없이 우시던 당신. 당신의 마지막 선물이 된 팬티 5장 지금도 입어야 할지 그냥 평생 간직만 해야 될지 고민이 됩니다.
마지막 병원생활에서 너무 마른 당신을 뒤에서 꼭 안으며 다음 생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남편이 아니라 아들로 태어나라고 내가 당신의 엄마가 되어 오래도록 당신에게 사랑을 주겠노라고 했던 그 말에 당신은 고개를 끄덕이셨죠.
당신이 내게 “당신 참 좋은 사람이야.”라는 마지막 그 한마디가 제가 살아가는 이유이고 힘입니다.
여보 14년 밖에 함께 못했지만 시간상으로는 다른 사람들 40년 산 것 같은 분량일거예요. 여보 그 힘으로 살게요.
당신이 나를 알아봐 주고 내 남편으로 와줘서 고마워요.
그곳에서 천년을 하루 같이 보내고 계시죠.
당신이 어떤 이에게는 힘든 하루가 어떤 이에게는 간절한 하루라고 하신 말씀 생각하며 간절한 하루로 소중히 보내고 있어요.
저도 이곳에서 하루가 천년 같은 나날이 아니라 천년이 하루 같은 간절하고 소중한 날들 보내고 당신께 갈게요.
내 모습이 너무 늙고 초라해 보여도 당신이 환하게 맞아주실 거라 믿어요.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당신의 아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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