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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편집부
오늘 아침 아끼는 지인 중에 한 명이 ‘별거’에 들어갔다.
이 글을 쓰기 정확히 12시간 전, 그녀의 남편은 집을 떠났다.
적잖이 당황한 나는 “원고에 쓰려던 시인데 말이지….”하며
800년 전의 시를 문자로 보냈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였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 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을 깡그리 쓸어 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순간…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난 울지도 않았고, 억울해 하지도 않았으며, 내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지도 않아.
난 징기스칸 기질인가봐. 아주 맘에 들어.
슬퍼하고 바닥으로 침몰하고 싶은 나를 극복하고, 징기스칸이 될테야….’
한 번의 떠남과 한 개의 추억…. 이어지는 두 번째 만남은 수학의 규칙과 같이 정확하게 반복된다.
떠남은 만남의 전제에 어느 정도 시간이라는 조건 위에서 진행되고,
떠남의 발효와 동시에 떠나기 직전까지의 모든 시간은 추억이란 이름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또 다른 만남의 길을 걷게 되겠지….
그렇게 떠남은 끝이 아닌 것이다.
전제가 있었고, 제 3의 시작과 꼬리를 물며 내 의사에 상관없이 마치 고장 난 종료 버튼처럼 나의 의지는 효력을 잃은 체 나를 다음 단계로 안내한다.
여기서 내가 핸들의 주도권을 잡고 싶다면, 이 떠남 뒤의 자신이 더욱 발전된 모습이고 싶다면, 부디 부정적인 감정과 기억들… 무엇보다 자기연민의 합리화를 깡그리 버리고 떠나기를….
어떻게 떠나야 할까?
어떻게 떠나야 이어지는 만남은 그 전보다 더욱 빛나고, 발전될 수 있을까?
이 떠남을 먼 후일 뒤돌아보며 난 후회할 것인가.
아니면 자랑스러워 할 것인가.
800년 전 한 남자가 자신에게서의 떠남을 우연히 만나며 난 흐릿한 해답을 찾았고,
원치 않았지만 결국 마주한 떠남에 대응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확실한 해답을 얻었다.
그녀의 다가올 자기 자신과의 만남은 멋질 것이다. 슬픈 떠남 뒤에 찾아오는….
떠남보다 더 무서운 ‘자기연민’의 늪을 그녀는 깡그리 버린 것이다.
내가 떠났든 남이 떠나갔든 그녀는 어제보다 강하고, 그제보다 유연해 보였다.
갑자기 닥친, 결코 원치 않았던 떠남 앞에서…
그녀는 제일 먼저 자기를 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징기스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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