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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감사와 용서의 마음으로

작성자
양향란
작성일
11-11-25
조회수
1,070

감사와 용서의 마음으로

글 양향란

어머니 학교에 등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런 기회가 아니었으면 언제 이렇게 내가 살아왔던 시간들을 글로 표현해 볼 수 있었겠는가? 우리 부모님께선 7남매를 낳으셨다. 유난히도 딸을 기다리셨던 아버지는 다섯 번째로 나를 낳자 소 잡고 잔치할 만큼 좋아하셨다고 한다. 그런 탓에 동네 분들과 아버지께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내 기억 속엔 아프고 불행했던 기억이 더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는 조합장을 하셨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엔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어머니는 낮에는 논일, 밭일을 하시고 저녁엔 음식을 장만해서 손님을 치르시느라 분주하셨다. 손님들이 가고 난 다음에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주 싸우셨고 아버지는 술상을 뒤엎으시고 어머니를 때리시기도 하셨다. 그럴 때마다 내 가슴은 너무나 불안했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만 조용히 계시면 싸우지 않을 것 같아서 어머니에게 제발 조용히 하라고 애원하며 말렸지만 내 말을 듣지 않으시는 어머니가 미웠다. 또 술에 취해 아궁이 앞에 앉아 우시는 어머니가 보기 싫고 창피했다. 차라리 엄마가 죽고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엔가 아버지가 서 주신 빚보증 때문에 우리 집엔 여기저기에 빨간 딱지가 붙게 되었다. 그 일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심하게 싸우셨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많이 때리셨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아버지는 어딘가 가셨고 어머니는 오빠들과 나에게 밥을 차려 주신 다음 옷 보따리를 챙겨 집을 나가셨다. 어머니가 옷 보따리를 챙기시면서 우시는 모습이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난 그냥 나가시라고 못 본 척 했다. 며칠이 지나고, 동네 사람들이 우리 어머니가 집을 나가셨다는 것을 다 알게 됐다. 동네 어른들은 나를 보면 측은히 여기셨고 아이들은 놀려댔다.
무엇이든지 내 마음대로 하려고 했던 성격 때문에 아버지만 안계시면 오빠들은 나를 쿵쿵 쥐어박았다. 큰오빠는 열 살이라는 터울이 있는데도 나를 귀여워해주기 보다는 내게 너무도 잔인했다. 친구와 개울가에서 재미있게 소꿉놀이를 하며 놀고 있는데 갑자기 큰오빠가 와서 나를 들어 올려 개울 속에 거꾸로 집어넣었다.
놀면 집을 어질러 놨다고 죽여 버린다며 칼을 들이대는 오빠. 그런 오빠가 무서워 도망가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게 되자 언덕 밑으로 떨어져 다쳤을 때도 아버지께 사실대로 말씀드리지 못하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엄마가 안 계셨기 때문에 큰댁에 사시던 할머니가 우리 식구들 밥을 해 주셨는데 쌀이 많이 줄었다며 큰오빠에게 퍼냈다고 야단치시자 자기가 펴낸 것 봤냐고 할머니에게 따져 물으니깐 할머니께서 거짓말을 하셨다.
“니가 퍼낸 거 갓난이가 봤다더라!”
큰오빠는 바로 나한테로 달려오더니 마루에 서있던 나를 들어 마당에다 내동댕이쳤다.
난 살기 위해서 벌떡 일어나서 오빠가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큰 오빠는 너무도 무서운 존재였다. 물론 다른 오빠들도 큰오빠에게 많이 맞았다. 난 그 후로부터 할머니를 싫어하게 됐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날카롭게 공격하는 성격을 갖게 됐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신지 몇 달이 지났을까? 천덕꾸러기가 되어 있는 내가 불쌍했던지 술 취해 들어오신 아버지는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물으셨다.
“엄마 보고 싶냐? 데리고 올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나를 안고 내 뺨에 얼굴을 비비시며 우시던 모습을 난 지금까지 기억한다.
다음날 아침 첫 배로 아버지는 어머니를 찾아오신다며 목포로 나가셨다. 며칠이 지나자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 후로도 우리 집 분위기는 별로 달라진 게 없고 오히려 더 나빠졌다. 그 동안에 일곱 번째인 막내 여동생이 태어났는데 백일도 안 되서 죽고 말았다. 아버지는 엄마가 잘못해서 아이가 죽었다며 심하게 구박하셨고 그 뒤로 어머니는 술 드시고 우시는 날이 더 많아졌다.
큰오빠는 아버지가 안계시면 어머니에게 돈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다. 집에다 석유를 뿌려 불 지르고, 칼을 들고 위협하고, 밖에 나가선 사람들 두들겨 패고 다니고, 내게 집은 따뜻한 곳이 아니라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집이 너무나 싫고 날 세상에 태어나게 한 엄마가 원망스러워 소리소리 지르며 대들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나를 나무주걱으로, 때론 부지갱이로 마구 때렸다. 아무리 맞아도 ‘잘못했어요’ 라는 말을 하지 않은 탓에 어머니는 내 머리채를 잡고 나무주걱이 반으로 갈라지도록 때리고, 부지갱이가 부러지게 때리시다 지쳐 우셨다. “이 독한 년아 잘못했단 말 한번만하면 안 맞을 텐데.... 차라리 눈에 안 보이는 곳에 가서 죽어라.” 하고 소리 질렀다. 정말 죽고 싶어졌다.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 내 손이 닿지 않은 곳에 올려놓아진 농약병이 눈에 들어왔다. 양동이 위에 판자를 올려놓고 밟고 올라가서 농약병을 내리려는데 어머니가 무슨 소리를 들으셨던지 “너 이년!”하며 부지갱이를 들고 쫓아 오셔서 또 두들겨 맞았다.
군대가 있던 둘째 오빠에게 편지를 썼다. “죽고 싶다. 집이 싫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다.” 그런 내용이었다. 그 편지를 며칠 동안 책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책가방 검사를 하시던 담임선생님에게 걸리고 말았다.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물으셨다.
“집에 무슨 문제 있니?”
그때 내가 쓴 편지에 빨간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 놓은 것이 보였다. 너무 화가 났다. 그동안 난 학교에서 늘 밝고 명랑한 모습으로 포장돼 있었는데, 포장해 놨던 내 자신이 발가벗겨져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나를 들킨 것만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선생님을 한참동안 노려보다 쏴 붙이기 시작했다.
“선생이면 선생이지 뭣 하는 짓이어요! 난 학교 다니기 싫으니까 잘라버리세요!”
그때부터 나의 가출은 시작됐고 난 문제아가 되어갔다.
그때 내게도 좋아하게 된 남자애가 있었다. 많이 수줍어했고 순했다. 공부도 괜찮게 했다. 내가 좋아한다고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애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가 건드리면 고개만 더 푹 숙였다.
나의 청소년기는 그렇게 지났다. 그 애는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탓에 여수 수산대학을 가게 됐다. 3학년 여름 때 그 애를 다시 만났다. 배를 타고 외국으로 나가게 되는데 5년 동안 오지 못한다고 했다. 외국으로 가기 전, 그 애와 만나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다. 어느 정도 술에 취한 것 같아서 말했다. “나 네 집에 데려다 놓고 갈래? 내가 너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 그 애는 아무런 말없이 그냥 웃었다. 나중에 알게 됐다. 내 친구와 좋아하고 있었음을. 몇 년 동안의 내 짝사랑은 상처를 입고 그렇게 끝이 났다.
난 많이 아파하며 방황했다. 그때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됐다. 내가 꿈꿔왔던 이상형은 아니었지만 나를 좋아해주고 간섭해 주는 것이 마냥 좋았다. 나에게 교회에 같이 가자고 했다. 내게 교회에 가자고 말한 사람은 그 사람이 처음이었다. 삶에 지쳐있었고 뭔가를 의지하고 싶었을 때였기 때문에 그 말이 반가웠다. 솔직하고 성실한 사람처럼 보였다. 난 서둘러서 결혼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나도 결혼해서 잘사는 모습을. “저년은 시집가면 사흘도 못살고 쫓겨 올 년! 시아버지 수염도 다 뽑을 년! 꼭 너같이 억센 놈 만나서 너 같은 딸만 낳고 살아봐라.”
자식한테 악담을 했던 엄마에게 더 보여주고 싶었다. 남편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진실하지도 성실하지도 않았다. 일하기를 싫어했고 도박성을 띈 것은 다 좋아했다.
33세에 혼자되신 시어머니께 남편은 특별한 아들이었다. 전설의 고향 같은 드라마에서나 있을법한 일들을 겪어야 했다. 남편이 직업이 없이 놀고 있었기 때문에 해남읍에다 신혼살림은 차렸지만 남편과 난 시댁에서 농사일을 하며 1년 동안 살았다. 그 1년이 내게는 10년만큼이나 길고 힘든 시간이었다. 시어머님은 남편과 내가 조금 사이좋게 보이면 꼴 보기 싫다며 싸움을 시키셨다. 저녁에 집에 있을 때면 남편은 시어머니 무릎에 베고 누워서 자기 어머니의 젖가슴을 주물럭거리고, 시어머니는 며느리인 내가 옆에 있어도 웃으시며 좋아하셨다.
남편에게 보기 싫으니 그러지 말라고 말했다가 자기 어머니와 자기를 이상한 사람 만들었다고 남편은 나를 두들겨 팼다. 새벽부터 일어나 캄캄한 밤에까지 일을 하면서도 한 번도 편하게 누워 잘 수가 없었다. 문이 따로 있는 작은 방에선 시 큰아버님이 기거하고 계셨기 때문에 위 아랫방으로 되어있는 안방에서 생활해야 했는데 텔레비전을 늦게까지 보는 남편 탓에 아래쪽 방에서 남편과 내가 지냈다.
시어머님은 미닫이 문을 반쯤 열어 놓은 채로 주무셨다. 난 벽 쪽을 보고 누워 새우잠을 자다가도 남편의 팔이나 다리가 내 몸에 올려지면 깜짝 놀라서 내려놓고 언제 시어머니께서 불을 확 켜실지 모르기 때문에 조심스러워서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시어머님은 거의 매일 새벽이면 우리가 자는 방에서 부엌으로 나가는 문 뒤에 있는 요강에 소변을 보신다음 아랫목에 앉아 남편과 내가 자는 모습을 보시며 한숨을 푹푹 쉬시다가 남편 허리에 기대고 엎드려 주무시곤 하셨다.
시어머님은 겉으로 보기엔 새벽기도도 잘나가시는 신앙이 좋은 분이셨고 자식에겐 장한 어머니셨다. 하지만 내겐 54세 밖에 안 된 젊은 시어머니였고, 감당하기 힘든 너무도 오랫동안 짊어지고 가야할 큰 짐으로 느껴졌다. 남편은 늦은 시간까지 자다가 일어나면 면소재지에 있는 당구장에 가서 돈내기 당구나 화투를 치다가 밤이면 다방 아가씨들 데리고 술 마시고, 가끔씩 외박도 했다. 외박을 하고서도 다음 날 저녁에나 들어오는 남편은 나를 마구 때리기 일쑤였다. 맞았다며 인상 찌푸리고 앉아있으면 시어머니는 나를 야단치시고 그럴 때면 남편은 자기 어머니 마음을 불편하게 인상 찌푸렸다며 임신해 있는 나를 때리곤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헤어져야지, 헤어져야지’생각하며 그런 생활이 되풀이 되는 가운데 첫아이를 낳고 둘째를 낳고, 셋째를 임신했다. 6개월쯤 되었을 때 목포에 사는 남편 친구 개업식에 가게 됐다. 돌아오다 음주운전을 하던 남편이 졸면서 중앙선을 넘어가길래 앞에 차 온다고 다급하게 소리 질렀더니 깜짝 놀라게 했다고 차를 세워놓고 한손으로 목을 조르고 얼굴과 머리를 마구 때렸다.
코에서 피가 수돗물처럼 흘러내려 입고 있던 바바리와 속옷까지 젖어서 옷이 척척했다.
얼마나 맞았는지 모른다. 그대로 집으로 가면 또 맞을 것 같아서 ‘이렇게 사느니 죽어버리자’ 생각되어 가고 있는 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옷과 신발은 다 찢어진 채로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이집에 와서 하나님을 알았구나.’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이 찬양을 하며 참 많이 울었다.
셋째 찬미를 낳았다. 심실중격결손이라는 심장병을 가지고 태어난 찬미를 통해서 목숨까지 주신 주님의 사랑도, 한없이 희생하신 어머니의 사랑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동안 성경말씀도 열심히 읽으며 세 아이를 업고 안고 데리고 다니며 교회에 가서 봉사도 하며 전도도 하러 다녔다. 여전히 시어머니와 시누들은 나를 힘들게 했다.
남편은 시댁에만 갖다오면 나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었고 내가 말대꾸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때리기 시작했다. 맞아서 들것에 실려 병원에 실려 가고 다리 깁스 한 적도 병에 입원 한 적도 있다. 헤어져야지 생각하면 어머니가 하셨던 “저년은 시집가면 사흘도 못살고 쫓겨 올 년”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차라리 남편이 죽고 없으면 나 혼자서 아이들을 잘 키우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난 늘 마음속으로 남편이 죽기를 바랐다. 밖에라도 나가면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었으면, 전화벨이 울리면 저 전화벨소리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어머니학교가 시작되기 두달 전 쯤 난 이혼을 결심하고 웬만큼 마음정리가 되었었다.
남편이 죽기를 기다리다 내가 죽을 것 같았다. 아니 나의 영혼은 이미 미움과 분노로 병들어 기도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머니학교 5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 아주 유익하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하나님과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살았음을 깨닫게 하셨다. 내가 귀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도 알게 하셨다. 내가 나를 알고 이해한 만큼 나를 힘들게 했던 남편과 시어머니와 시댁 가족들 속에 자라지 못한 아이가 있음을 보게 하시고,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 하셨다.
어린 자식들을 가슴에 묻고 아프고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사신 친정어머니께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과 용서를 비는 마음을 주셨다. 나는 할 수 없으나 내안에 주님이 함께 하실 때 가능함을 보게 하신 하나님! 소름끼치게 미웠던 미움도 죽기를 바랐던 미움도 없게 하셨다.
어머니학교를 마치고 처음으로 시아버님 추도예배를 드리며 시댁 가족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는데 예전과 같은 미움도 어색함도 없이 밝은 마음으로 대할 수 있었다. 남편도 나름대로 달라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신 하나님과 어머니학교를 기도로 준비하고 봉사하며 수고하신 스태프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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